리처드 포스트의 기도
A. 안으로 향하는 기도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구하는 기도)
1.단순한 기도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는데, 현대의 고학력자들에게 거의 보편적인 것으로서, 기도하기 위해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먼저‘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에 따르는 철학적 문제들을 연구해야 하고 기도의 위대한 전승을 더 잘 이해하는 등 선행되어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기도를 하게 되면 오히려 ‘낮아지고’ 통제권을 조용히 넘겨주고 무능한 자처럼 된다. 에밀리 그리핀(Emilie Griffin)은 ‘기도하는 것은 기꺼이 소박해지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우리의 이러한 생각들, 즉 모든 내적인 영혼의 추구가 실제로는 우리의 기도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원의 이편에서는 선과 악을 절대로 구분하지 못하며 순수한 것들과 불순한 것들을 나누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며 또한 은혜로 기도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 것은 기도는 어린아이들이 부모님께 나아 오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1)있는 모습 그대로 기도하라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이다. 단지 아무런 가식 없이 우리의 관심을 나누고 간청할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한다. 단순한 기도는 성경에 나오는 기도 중에서 가장 흔한 기도이다. 성경의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고상하거나 아량이 넓은 사람은 거의 없다.(모세, 엘리사등)
단순한 기도에는 좋은 것, 나쁜 것 그리고 흉한 것 모두가 섞여 있다. 단순한 기도는 초보적인 기도다.
그런데 이런 가장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특히 ‘현학적인’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보다 ‘성숙한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애쓰나, 단순한 기도는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는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뿐이다.
(2)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바로 우리가 있는 곳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소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곳이 직장, 가정, 동료, 친구., 가족 그 누구와 함께 있든 그곳이 바로 기도를 배우는 곳이다.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들에 관해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한다. C. S루이스는 ‘우리 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3)단순한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첫째, 기도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라. 둘째, 이 기도를 시작할 때 기도가 지금까지 부족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기도하려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의 원리에는 진보의 원리가 존재한다. 조깅하는 사람들을 택해서 마라톤 선수로 뛰게 하지는 않는다. 기도도 그렇다.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영적인 탐욕의 죄이다. 영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들조차도 자주 웃고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 우리가 악한 일을 행하고 있을 때조차도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불순종까지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드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 별로 중요한 사건이 없는 일상적인 기도에 먼저 힘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은 우리를 압도할 수 있지만 우리를 진정한 기도에서 멀어지게 할 수 도 있다.
(4)마음의 변화
단순한 기도는 종종 무시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리 자신이 당연히 기도의 중심이요, 주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놀랍고 신비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바뀐다. 마음의 변화와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2.버림 받은 자의 기도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려고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버림받은 자의 기도가 필요하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숨어 계신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성경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막에 비유하고 있다. (시22:22) 이처럼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자포자기의 상태는 우리 모두가 체험했거나 또 체험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과 같은 황량한 사막에 직면할 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1)큰길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앞서 이 길을 걸어갔다. 영혼의 어두운 밤, 무지의 구름, 신앙의 어두운 밤이 있을 때라도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수목을 말리는 것과 같은 뜨거운 바람을 맞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거나 당신이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두움이란 명확한 기도의 체험이다. 그것은 기대할 만한 것이며 심지어 끌어안고 싶은 것이다.
(2)기도생활에는 연속성이 없다.
버림받은 경험에 대한 두 번째 사실은 모든 믿음의 행로가 하나같이 목적에 부합된다는 것이다. 기도생활에는 어떤 특별한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어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반드시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귀여움과 사랑을 먼저 많이 받을 수도 있다.
(3)살아있는 관계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살아 있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이 자유롭게 자신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신다.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생각 속에 짜 맞추는 잘못을 서서히 제거시키신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자신을 늘 드러내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만남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20:19과 같은 고백을 때로 드려야 한다.)
(4)침묵하시는 하나님
당신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황량한 사막 속으로 던져 넣은 것 같은 침묵을 경험해본일 있는가?
(5)불평어린 기도
우리가 버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럴 때 우리는 불평어린 기도를 드릴 수 있다. 시편기자들은 그들의 고뇌와 좌절의 어휘들로 불평하는 법을 표출했고 때로 경외와 더불어 실망도 표현했다. (시109:1,시88:13-14)
(6)애타는 사랑의 짧은 화살
하나님의 침묵으로 인해 괴로울 때 우리는 ‘애타는 사랑의 짧은 화살’로 쏘아 맞추는 것이다.
(7)믿고 조용히 기다려라
버림받은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한다. 정신을 차리고, 민감하게 깨어 기다려라, 신뢰가 믿음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배워라
신뢰란 당신의 영적인 생활을 중립에 두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
3.성찰의 기도
성찰의 기도에는 첫째 의식의 성찰, 둘째, 양심의 성찰로 나뉜다.
(1)에벤에셀의 하나님
의식의 성찰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위 환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본연의 위치에 있기를 원하신다.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을 보고 듣도록 권유하시며, 그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발자취를 발견하기 원하신다. 의식의 성찰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2)의식의 성찰
의식의 성찰로 우리는 하나님을 초청하여 우리의 마음속 깊이 살피시게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알게 하신다.
한편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취급할 수 있는 그 이상 보기를 허락지 않으신다. 때로 너무 지나친 내면 성찰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
(3)값으로 따질 수 없는 은혜
성찰의 기도는 우리 안에서 자아 인식이라는 값비싼 은혜를 만들어 낸다. 바울의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고한 것은 경건한 말이나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누구이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용납하는 일에 근거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정할뿐더러 존중해야 한다. 이 제사는 우리의 살아온 경험을 드리는 제사다. 그것은 우리의 참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려야 할 유일한 제사는 앞으로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 그 자체이다. 우리의 약함까지, 이중성, 욕망, 허무주의, 게으름, 이 모든 것 까지 희생의 제단 위에 내려놓아야 한다. 완전하고 꾸밈없는 자기 지식은 우리를 유지하고 지탱해 주는 양식이다. 인생에 대한 긍정은 우리 자신의 악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4)내면을 향해 기도하는 것
성찰의 기도는 내면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바깥이나 위로가 아닌 오직 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행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통해서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5)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
방법은 영적 일지를 쓰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잇는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의도적인 반성이다. 일지는 누가 무엇을 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일기와 다르다. 일기는 왜 무엇 때문에 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다.
양심의 성찰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마틴 루터는 우리의 삶을 도덕적인 표준에 입각해 유지하는 수단으로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규칙적으로 묵상해 볼 것을 권장했다.
4.눈물의 기도
(1)마음을 찢는 회개
눈물의 기도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역하고 거기서 멀리 떠나 있었던 죄로 인해 마음을 찢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와 세상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에서 자유케 하는 회개의 경험을 갖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죄가 우리를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로부터 단절시켜 버린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을 말한다.
(2)눈물의 탄원
(욥,16;20,사16:9,렘9:1,애2:18,시6:6,56:8,42:3,시119:136,히5:7,마23:37,마5:4,눅6:21,눅7:36-50,ㅣ행20:19,행20:31,고후2:4,고후7:7-11)
(3)마음속의 큰 기쁨
이 모든 슬픔과 눈물과 애통의 의미는 옛사람들에게는 내적인 마음의 슬픔이 오히려‘마음속의 큰 기쁨’이라 불리어졌다.
사실 진정한 기쁨은,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원히 머리 숙여 경배하는 자들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결과이다. 바실레아 슐링크는 말하기를 ‘천국의 첫 번째 특징은 통회와 회개에서 나오는 넘치는 기쁨이다. 통회의 눈물은 아무리 굳은 마음이라도 부드럽게 한다.’고 했다. 교부 하우셔(Hausherr)는 ‘통회의 결과는 축복이다.’라고 했다.
(4)통회의 결과는 축복이다.
눈물은 통회의 하나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눈물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과 우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도록 감정적인 차원에서 용인하는 것이다. 우리의눈물은 우리를 지성에서 감성으로 내려오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눈물이 있는 곳에는 영원한 찬양과 경배가 있다.
(5)날마다 돌이키는 삶
눈물의 기도 기저에 깔려 있는 실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죄악된 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사망의 속박을 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하신 일은 ‘회개와 용서’의 사역을 제정하신 일이었다(요20:23). 회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한 번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물의 기도는 우리를 돌이키는데 가장 먼저 도움을 준다.
(6)회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
회개를 경험하는 방법은
첫째 하나님께 구함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둘째, 죄를 자백함으로, 셋째,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서로에게 전해야 할 은혜로운 사역을 부여받았다.(요20:23)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들에게 용서와 긍휼의 영을 불어넣을 수 있다.
넷째, 순종해야 한다. 용서라는 말 속에는 순종이라는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 일상의 모든 일을 통해서 우리는 순종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7)눈물이 나지 않을 때
먼저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고 사랑하라 당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끈기 있고 친절하며 확고한 지속성이다. 복음서를 깊이 묵상하라 영혼을 눈물로 적셔라 . 눈물의 세례를 체험하기 위해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크리소스톰의 말로 위로를 받으라 “죄의 불꽃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눈물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왜냐면, 눈물은 허무의 용광로를 끄며 죄의 상처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5.포기의 기도
우리를 투쟁의 단계에서 해방의 단계로 옮기는 것이 바로 포기의 기도이다.
포기 기도의 결과는 우리에게 영혼의 만족과 안식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포기의 기도를 배울 수 있다. 이곳에는 인간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있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에 관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설사 그것이 직접적으로 죄가 되지 않는다 해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길이며, 단념과 포기의 길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은 나의 뜻, 나의 방법, 나의 선은 반드시 더 높은 권위를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갈등은 포기 기도의 필연적 요소이다. 갈등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포기의 기도가 숙명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기도라는 사실 때문이다. 케더린 마샬(Catherine Marshall)은 ‘운명을 감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항성의 흙구덩이 속에 가만히 눕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것은 소망의 문이 닫혀 버리는 것을 말한다.
(1)귀중한 뿌리의 절단
우리 삶 속에 있는 가장 귀중한 뿌리가지도 잘라야 한다. 진정한 포기는 하나님의 방법은 옳고 선하다는 것에 대해 전심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포기의 기도는 진심으로 손을 떼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망 있는 포기다.
포기한 것이 영원할 때도 있다. 그런 때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어야 하며 그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기 위해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사실 안정된 평안은 포기의 길을 걸어 본 사람들이 가장 자주 경험하는 은혜이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훨씬 더 좋은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꿈을 버리도록 도와주신다. 더 완전한 대답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성품을 변화시키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포기가 있는 곳에 십자가의 죽음이 있고 그곳에는 자아에 대한 죽음이 있다.
하나님은 사용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먼저 무로 만드신다. 의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유인지! 주의 할 것은 우리의 의지의 말소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활과 관련이 있다. 의지를 못 박아 버리므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고 가장 훌륭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다.
(2)기도의 실제
포기의 기도는 일상의 구체적인 일들을 통해서만 드릴 수 있다.
먼저, 자기를 비우는 기도를 배우라. 둘째, 복종의 기도를 배우라, 셋째, 단념의 기도를 배우라, 넷째, 해방의 기도를 배우라, 다섯째, 부활의 기도를 배우라. 포기의 기도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완전한 만족과 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임을 안다.
6.성숙의 기도
우리는 먼저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기도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서 우리의 연약하고 이기적인 기도에 놀랍게 응답해 주신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시작할 때 우리는 심령으로부터 변화를 받게 되는데 옛사람들은 이 변화를 ‘콘베르싸치오 모룸(conversation morum)이라 했다. 부정적으로 이것은 현재 상태에 대한 죽음, 늘 그렇게 해왔던 관행이나 모습에 대한 중단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는 계속적인 변화, 끊임없는 전환,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끊임없는 수용을 의미한다.
(1)기도의 한계
거룩한 습관을 들이는 것이 물론 기도의 중요한 역할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훨씬 큰 전체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기도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우리의 계속적인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세 가지 주요영역을 달라스 윌라드(callas willard)는 세 가지 영역으로 말한다. 첫째, 금식, 예배, 찬양 등의 영적인 생활에 대한 전통적인 훈련, 두 번째, 저항, 불순종, 회개, 굴복, 믿음, 순종등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상호작용, 세 번째 영역은 우리가 매일같이 접하는 갖가지 좌절과 시련과 유혹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키워 주시는 인내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기독교 신앙의 다른 영역들과 분리시키거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 이상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반적인 영적 생활과 조화시켜 기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성숙의 기도는 영적 생활에서의 완전주의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와 성장과 변화와 성숙의 중요성이다.
(2)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
성숙의 기도에서의 능동적인 면은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 수동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대상이다.
(3)훈련, 그리스도를 닮는 것
우리의 변화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성숙의 기도에는 세 가지 고전적인 방법이 있다.
첫째는 이그나티우스가 쓴 ‘영적 훈련(spiritual exercises)에서 유래한 ’훈련체제에서의 네가지 단계 내지 사주간이 있다 첫 단계는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우리 죄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 두 번째, 그리스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수난, 네 번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면 우리는 읽는 수준에서 몰입하는 수준으로 바뀌게 된다.
(4)성 베네딕트의 열두 단계
성숙의 두 번째 고전적인 접근방법은 ‘성 베네딕트의 룰(the rule of st. benedict)이라는 책에 묘사된 대로 겸손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야곱의 사다리 비유를 사용, 겸손에 이르는 열두 단계를 설명한다.
겸손은 가능한 한 진리와 가까이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겸손은 사실 생명을 일으키는 힘으로 가득 차 있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한 것과 같이 ‘겸손은 기도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다’ 베네딕트에 열두 단계 중 몇몇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또 세 가지는 혀의 사용과 관련되어 있어 우리 생활 중 특히 언어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때론 침묵할 줄도 알아야 하며, 경박한 말을 피하고, 쉽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겸손의 단계 중 하나는 ‘우리가 당하는 상처와 아픔을 인내하며 참는 것’이며 또 하나는'범사에 자족하는 것‘ 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단순하고 일반적인 일을 하는 것이다. 분수를 넘어서 과욕을 부리는 일들에 대해 여러 번 죽는 경험을 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겸손이라는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된다.
(5)작은 길
성숙의 기도의 세 번 째 고전적인 접근은 리지외의 떼레즈(therese of Lisieux)가 말한 작은 길이다. 그 길은 비천한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고 부당한 비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고 원수 같은 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작고 사소한 행동들을 통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것들을 통해 이기심을 정복할 수 있다.
성숙의 기도가 갖는 수동적인 측면의 세 가지 접근
이러한 접근의 최우선적이고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바로 고독이다. 고독이 없이는 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고독을 체험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죽는 것이다. 고독은 때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에게 극심한 생존 경쟁에서 이길 힘이 아니라 그 생존 경쟁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묵상해 보는 것은 자신의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유서 깊은 방법 중 하나이다.
수동적 성숙의 기도의 세 번째 유형은 ‘유순한 기도’이다. 그것은 완전히 온순하고, 완전히 솔직하며,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포기하는 경험‘을 말한다.
유순한 기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이러한 연약함이요 무방비로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토기장이인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맡기라.
겨울은 나무가 생존하고 번창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모든 것이 메마르고 흉하게 보이고 오점과 약점과 불완전함이 뚜렷이 부각되지만 단지 그것은 외관상의 아름다움이 없어졌기 때문이고, 근본적인 아름다움은 사실 강화되고 있다.
7.언약의 기도
언약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갈망하는 마음속 깊은 외침이다. 언약의 기도의 제단 앞에서 우리는 확고부동한 헌신을 맹세하고, 굳은 의지로 결단하고, 거룩한 순종을 약속한다.
(1)약속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헌신과 훈련과 고정된 습관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자유는 훈련과 헌신의 산물이다. 우리는 헌신을 하게 되면 우리의 생활에서 자발성과 기쁨을 모두 빼앗기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디트리히 본회펴는 ‘기도는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구하신다. 그러나 의무적인 일도 성령의 힘으로 할 때 그것은 커다란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우리가 헌신을 회피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우리가 약속을 완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기쁘게 하려는 당신의 노력을 기뻐하신다. 마음속의 언약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다.
언약의 요점은 헌신이다. 갈보리의 희생은 하나님 편에서의 헌신이다.
(2)거룩한 순종의 언약
우리는 하나님 사랑이라고 하는 거룩한 제의에 대해서 제일 먼저 거룩한 순종의 언약을 통해 반응한다.
순종의 문제는 하나님의 일이고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면 반드시 순종할 힘까지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굶주림을 주시는데 그것은 순전하고 참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경험을 통해 영원히 변화된다. 결코 일상적인 선행만 가지고서는 충분하지 않으며 어중간한 임시변통의 수단으로는 마음의 욕구를 채울 수 없다. 공의로우시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기준, 즉 온전한 순종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사로잡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은 먼저 그분께서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한번 순종의 맛을 보고 나면 우리는 그것을 더 원하게 된다.
순종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을 고갈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화시키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3)시간의 언약
이는 규칙적인 기도 생활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은 자만심을 없애고 마귀의 책략을 깨뜨린다.
규칙적이란 무슨 말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과 당신의 개성과 당신의 필요에 달려 있다.
그러나 실현 불가능한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서는 안 된다.
개개인의 차이와 계획에 따라 기도 시간을 너그러이 정하도록 했지만 우리는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도록 훈련해야 한다. 기도의 시간은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박하고 실제적인 결심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4)장소의 언약
시간의 언약이 계속성을 부여한다면 장소의 언약은 안정성을 보장한다. 장소의 언약은 우리에게 집중의 은사를 준다. 장소의 언약에는 공동체에의 헌신이 내포되어 있다.
(5)마음의 준비를 위한 언약
리차드 백스터의말대로 ‘가장 적절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혀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마음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준비는 도움이 될 수 있다. 시편은 교회의 기도서이다. 당신만의 작은 성소를 준비하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
(6)하나님과의 밀회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기쁘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면 즐겁기 때문이다.
B.위를 향한 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구하는 기도)
8.찬양의 기도
기도는 모든 영혼을 둘러싸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대답이 가장 직접적일때 그것을 가리켜 찬양이라고 한다. 찬양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존귀히 여기며 찬송하고 칭송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발적인 열망이다.
찬양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을 구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만을 구한다.
(1)찬양의 두 가지 측면
찬양의 기도에는 감사와 찬송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찬송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찬송이 감사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할레스비(Ole Hallesby)는 그의 고전적인 저서 ‘기도’에서 “감사를 드릴 때 내 생각은 어느 정도 여전히 내 주위에서 맴돌지만, 찬송을 드릴 때 내 영혼은 자신을 잊고 찬양하는 경지까지 오르게 되며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그의 은혜와 구속만을 바라보고 찬송하게 된다.
송축은 기쁨에 넘친 최고도의 찬송이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찬송으로 큰 기쁨을 얻게 된다.
(2)하나님의 눈물
하나님은 우리의 자그마한 감사의 표시에도 기뻐하신다.
(3)찬양을 방해하는 것들
C. S 루이스에 의하면 찬양의 방해자의 첫 번째는 부주의함이다. 둘째는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세 번째 찬양의 방해 요인은 탐욕이다. 네 번째 방해요인은 자부심이다. 자부심이 발동하면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가에 다시 한번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4)디딤돌
찬양의 기도는 배워야 한다. 더 깊고 온전한 찬양을 위해 우리는 가능한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좌절과 두려움 등 우리가 처해 있는 일상적인 삶의 구석구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중심의 감사를 드리라 이는 무엇인가를 움켜쥐려고 하는 모든 욕심과 모든 갈등과, 거부하고 부정하는 모든 마음 상태에서 해방된 시간과 장소를 말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중심이 있다. 가능한 자주, 상상 속에서 그 중심으로 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조용한 감사의 기도가 흘러나오도록 하라. 다음으로 감사의 실천의 단계로 나아 갈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아무리 확대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지막으로 기쁘고 유쾌하게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는 것이다.
리차드 백스터는 우리에게 말한다. “천사의 사역인 찬양에 전념하라 가장 지고한 영들이 가장 지고한 일을 하듯이 우리가 하는 일이 지고하면 할수록 우리의 영도 더욱 지고해진다.
9.안식의 기도
안식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폭풍의 눈 속에 두신다.
(1)안식의 기도를 배우라
(2)하나님 안에서의 안식
안식일 원리에서 도출되는 어떤 교훈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한다는 중심 원리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들어가지 못했던 하나님의 안식에 초대받았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안식하러 오라”는 말이다.
(3)기도는 ‘중간태’로 일어난다.
안식의 기도에 들어 갈수 있는 방법은 근면만으로 노력하고 의지력으로 마음을 굳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완전히 수동적인 자세가 해답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란 체념이나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간태란 우리가 행동을 취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즉 우리가 행동의 형성에 참여하여 그 유익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옛 성현들의 ‘거룩한 여가’는 중간태로 생활하고 중간태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4)영원하신 삼위 하나님의 활동
우리는 기도할 때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갖출 필요는 없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하고 이기적인 기도를 재구성하고, 정제하며 재해석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성령의 이런 사역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더듬거리고 실수가 많은 기도를 하는 동안 자신과 영원한 교제를 갖고 계신다. 포어시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은혜의 대화는 실제로, 자신과의 대화로써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독백이다. 우리에게는 연약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영원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이 있다.
(5)세 가지 전통적인 실천 방법
첫째, 고독이다. 고독은 우리의 피상적인 안전의 껍질을 깨뜨려 열어주며, 부수어 준다.
둘째, ‘실렌시오(silencio)'이다. 그것은 옛사람들이 ’피조물의 활동‘이라고 불렀던 것을 하지 않고 멈추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침묵이라기보다는 사람들과 환경을 우리 마음대로 쥐고 흔들고 통제하기를 그만두고 침묵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조종하려는 우리의 상호의존적인 운동에 대항하여 굳게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떠들썩한 피조물의 활동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다.
이처럼 피조물의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나면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방법은 ‘묵상’이다. 묵상이란 집중을 의미 한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과 영의 고요함을 의미한다.
(6)가볍게 컵을 쥔 모양의 손
하나님은 우리를 가볍게 컵을 쥔 모양의 손으로 보호하고 계신다.
10.성례의 기도
성례의 기도는 성육신의 기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한 연합이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은 한편은, 예배 의식과 성례와 기도문을 강조하는 사람들과, 한편은 친교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와 자발적인 기도를 강조하는 부류로 나뉘어져 왔다. 둘다 같은 성령으로 감동받은 것이기에 어떤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할 필요가 없다. 때로 규칙적인 헌신의 의식들이 일종의 뼈대를 형성하여 그 위에 끊이지 않는 기도의 근육 조직을 세울 수 있게 해준다. 대가 의식이라고 불리는 규칙적인 신앙 형태는 하나님이 정하신 은혜의 수단이다.
(1)예배의 모범과 전례
시편은 성례 의식과 성전 예배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규례대로 회당에 올라가셨다. 쉐마를 암송하고, 테필라라는 찬송을 불렀다. 신약의 서신서에도 여러 개의 찬송과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이런 공동체에는 기쁨 가운데 자발적인 신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2)기도서의기도가 주는 자유
모든 예배 의식은 성례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기도서가 주는 몇 가지 자유는
첫째, 기도서의 기도는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열망을 말로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둘째, 기도서의 기도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일’에 우리가 연합할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기도서의 기도는 남의시선을 집중시키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유혹에 대항할 수 있게 해 준다.
넷째, 기도서의 기도는 개인적인 종교의 유혹을 이기게 한다.
다섯째, 기도서의 기도는 자칫 습관적으로 하기 쉬운 기도에 빠지지 않게 한다. 습관적인 기도는 피조물과 창조주사이의 무한한 차이와 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3)생각해 볼 만한 관심사
한 가지 관심사는 틀에 박힌 기도와 기도서의 기도가 동일하지 않느냐는 것과 관계가 된다. 이러한 기도는 판에 박히고 형식적이나 그것은 일차적으로 하나의 이점이다.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바로 그 점이다.
또 하나는 불이익이 오히려 장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종종 타당성을 요구하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 불과하므로 거부할 필요가 있다. 기도서에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훌륭한 것들을 보존하도록 되어 있어서 우리는 최근의 유행이나 일시적인 변덕에 빠지지 않게 된다.
또 하나는, 형식이 고정되어 있는 의례적인 기도가 예수님이 심히 나무라신 ‘중언 부언’하는 기도는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문학적인 기교를 좋아하는 것은 맹목적인 숭배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리고 예배의 아름다움과 정확성만을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께 대한 마음속의 열망을 잃어버리기 쉽다.
마지막으로 옛 경건자들의 주장대로 우리는 예수님을 ‘회막의 포로’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4:24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기도할지니라 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4)옛날 방식의 새 노래
시편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이 바로 찬송의 목표이다. 또 시편은 우리를 하나님의 길과 뜻으로 인도해 준다. 이것은 기도의 목표이다. 따라서 기도와 찬송을 묶으면 강력한 결합이 이루어진다. 기록된 기도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시편이 가장 좋은 지침을 제공한다.
(5)가장 완전한 기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중심에는 성찬식을 거행하는 의미가 있다. 성찬의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라 할 수 있다.
교부시대의 성례 신학자 성 막시무스(St. Maximus)는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의 생명이 진실로 우리에게 나누어 준바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역사하는가 하는 것은 거룩한 신비다.”라고 하였다.
성찬 기도 중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늘 상기한다.
그러나 자격이 없다고 망설이지 말라. 성찬은 분명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6)말씀의 성례
성찬의 성례는 눈을 통한 복음이고 말씀의 성례는 귀를 통한 복음이다.
설교는 우리의 삶 속에 부어 주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수단이며 가장 중심적인 은혜의 방편이다. E.M 바운즈는 “우리의 기도 성격이 설교의 성격을 결정한다. 가벼운 기도는 가벼운 설교를 만든다. 기도는 설교를 강하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게 한다.
거룩한 기름 부음은 영적인 기름 부음의 신비로서 설교와 다른 모든 의사소통 사이를 구별해 주며 설교시에 임하는 역사이다. 그것은 설교에 들어 있는 신성이며 설교에 요점과 날카로움과 권위를 부여해 준다. 그것은 계시된 진리에 하나님의 모든 능력을 불어넣는다.
(7)몸으로 드리는 기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몸을 통해 우리에게 중재된다.
11.쉬지 않는 기도
(1)중단 없는 교제
(2)불타는 열정
쉬지 않는 기도는 혼돈된 가운데서도 평화를 말해 주는 면이 있다.
(3)단숨의 기도
단숨의 기도의 뿌리는 시편에 뿌리를 둔 것으로 반복되는 어구가 우리에게 시 한편으로 생각나게 한다. ((시139:1)
(4)하나님의 임재 연습
매일 매일의 모든 활동을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기쁘게 해 나가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찬양과 감사를 속삭이듯이 기도로 올려 드리면 된다.
(5)쉬지 않는 기도의 단계
첫 번째 단계는 외적 훈련의 단계이다. 둘째, 이 일이 잠재의식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가 마음속에 박히는 것이다.
네 번째, 기도가 전인격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6)두 가지 문제
반복적인 기도가 중언부언 하는 기도가 아닌가 하는 문제에 있어 예수님의 이러한 지적은 당시의 특정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반복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둘째문제는 성격상 실천적인 것에 가깝다. 하나님은 영혼의 지성소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12.마음의 기도
(1)내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싶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고,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바로 마음의 소리이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도 마음이다."(장 니골라 그로우 jean-Nicholas Grou)
(2)시금석
마음의 기도는 아바 기도이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계속적인 아바 체험이었다.
(3)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성령
마음의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기도의 세 단계는 입술의 기도, 지성의기도, 마음의 기도이다.
(4)마음기도의 다양한 표현
성령께서 마음 기도를 통해 자기백성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몇 가지 방법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주시는 특별 계시의 느낌과 말씀을 통해서이다 (레마). 글로쏠라리아(Glossolalia), 즉 방언은 마음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글로쏠라리아를 사용해야 할 이유와 용도는 많이 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 놓임을 받기 위함이다. 마음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은 때때로 ‘입신이라고 지칭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언제나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거룩한 웃음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5)사랑의 반응
마음의 기도에 들어가는 첫 번째 방법은 단순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사랑의 장마비를 흠뻑 맞도록 하라.
13.묵상 기도
묵상을 통해서 진리가 입에서 머리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성경 공부가 해석이라면 성경 묵상은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이다.
성경 본문을 가장 간단하게, 가장 기본적으로 묵상하는 방법은 상상력을 통해서이다. 성경을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그 말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다.
(1)성경을 체험하며 사는 법
우리의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라. 성경의 많은 구절이 묵상 기도의 시금석이 된다. 묵상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의 뜻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치유하시고 용서하시고 변화시키시며, 권세를 주시기 위해 실제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
(2)풍성한 우물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가 쓴 ‘모세의생애(The Life of Moses),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 성 프랜시스의 작은 꽃들(The Little Flowers of St,. Francis),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는 노리치의 줄리아나가 Tsm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Revelations of Divine Love), 토마스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상처받고 깨어진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을 넓혀 주는 작가 존 울만의 ’저널(Journal). 영적인 생활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가장 유서 깊은 방법 중 하나는 수세기에 걸친 성인들의이야기를 읽는 것이다. 14세기에 쓰여진 ‘안토니의 생활(The Life of Anthony), 아빌라의 테레사가 쓴 자서전(Autobiography), 20세기의 ’도요히꼬 가가와‘, 신앙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증거들에 대해 정말로 도움을 주는 입문서중 하나가 제임스 길크리스트 로슨의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더 깊은 체험(Deeper Experiences of Famous Christians )이라는 책이다.
기도로 충만한 독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위해 하도록 시키시는 것이다. ‘거룩한 글들 속에 담긴 웅변을 찾지 말고 진리를 찾아라. 거룩한 글들은 모두그것이 쓰여질 때와 똑같은 정신으로 읽어야 한다. 크든 작든 저자의 권위나 학식에 영향받기보다는 순수한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읽으라.
(3)하나님께서 일하신다.
누구든지 묵상을 하고자 하는 소원과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지 아니하고 그저 묵상을 시작하는 사람은 이내 포기하게 된다. 묵상하고자 하는 소원과 묵상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는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한 절대적인 약속이다.
14.무언의 기도
무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 들어간다.
무언의 기도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1)두 가지 중요한 준비
하나님과의 연합의 목표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연합이 순전히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다면 우리 편에서 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준비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마음이다. 쇠렌 케이르케고르는 “마음의 순수함이란 오직 한 가지만을 소망하는 것이다. 무언의 단계의 세 가지 기본적인 단계 중 첫 번째 단계는 마음의 평정이다. 두 번째 단계는 ‘고요의 기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고요함이다. 유순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하기 쉽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려 하면, 하나님의 가르침은 생명이 되고 빛이 된다. 무언의 기도의 마지막 단계는 영적인 신비 체험으로 황홀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황홀경은 최고도에 달한 무언의 기도이다.
C.밖으로 향하는 기도
(필요한 사역을 구하는 기도)
15.일상적인 기도
(1)일상적 기도의 방법
첫째,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들을 기도로 바꾸는 것, 둘째,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셋째,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을 하면서 내내 기도하는 것이다.
(2)일상적인 것의 신성함
(3)일상생활 속에 계시는 하나님
(4)행동으로 하는 기도
기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삶이 동반될 때뿐이다.
(5)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
일상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생활 중에 겪는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기도하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도 일상적인 시간에 속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이며, 그러할 때의 기도는 말로 할 수 있는 기도보다 훨씬 더 나은 기도이다.
(6)거룩함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정에서 생겨나는 기도가 아마 ‘일상적인 기도’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일 것이다. 가정에 기도처를 만들 수 있다.
16.간구기도
(1)간구 기도와 중보기도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간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 중보라고 한다. 구하는 것은 그 두 가지 경험의 핵심부를 차지한다.
우리가 무엇인가 구하는 기도는 더 유치하고 미숙한 형태의 기도인 반면, 찬양과 묵상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요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고상한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영성에서 나왔다. 간구는 낮은 수준의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식이다.
(2)간구 기도의 두 가지 문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행위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포어시드에 의하면 ‘사랑은 이미 알고 잇는 것이라도 들어 보기를 좋아한다. 또한 사랑은 주고자 하는 것도 요청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들을 뒤로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겸손이다.
(3)응답없는 기도의 문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은사를 보류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사실상 응답되는 때가 많이 있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더 깊은 의도를 이해하시고 우리의 보다 큰 필요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특정한 관심사를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시간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간구 기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 집중되기 때문에 결코 제삼자의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한 죄가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죄가 그 본질상 하나님과의 우리를 분리시키며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민감성까지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4)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진실로 포괄적인 기도이다.
*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이것은 우리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간구해야 함을 말한다.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주의 한복판에는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원과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소망이 놓여있다. 우리가 용서 할 수 있는 것도 단지 골고다의 숭고한 용서가 있었기 때문임을 명심하자 왜냐면, 바로 그것이 보복의 악순환을 단번에, 완전히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이 나이다 오히려 기억하기는 하되 옹서한 후에 더 이상 그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기적으로써 용서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분열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용서는 실제적인 상대방의 큰 잘못이 우리를 분열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사랑의 힘이 우리를 분리시키는 과실의 힘보다 큰 것을 의미한다. (마6:14)
* 구원해 주옵소서
이 뜻은 ‘주님, 제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을 드러내시고 주님께서 저를 시험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제 속에 없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뜻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권력과 영향력에 의해 유혹을 받고, 또 하나님과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는 기회로 인해 시험을 받는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원문에 보면 분명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총체적인 의미의 악이 아니라 악한 자, 곧 사탄에게서 구원받기를 기도하라고 강권하고 계신다. 허버트 파머(Herbert Farmer) 교수는 , 만일 기도가 신앙의 핵심이라면 간구는 기도의 핵심이다. 라고 한다.
17.중보기도
중보기도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며 심지어 자신을 내어 주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중보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중보기도는 제사장적인 사역인데 신약이 가장 도전적인 가르침 중 하나가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만인 제사장직이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요, 귀중한 특권이다.
(1)중보기도의 좋은 모범
포어시드(P.T.Forsyth)는 “우리가 결단의 골짜기에 더 깊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기도의 산으로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하며, 하나님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 주 관심사인 사람들의 두 손을 떠 받쳐 주어야만 한다.
(2)우리의 중보자
우리의 미약한 중보 기도는 영원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에 의해 뒷받침되고 힘을 공급받는다.
(3)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유일하신 계시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에서 끊임없이 통치하심으로써 성취하신 위대한 사역을 온전히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방법과 본성에 따라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내용과 성격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4)끈질긴 기도가 승리한다.
(5)집단적인 중보기도
(6)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중보 사역을 담당하는 방법은, 어떤 사람들을 규칙적으로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기 원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 두므로 , 또한 원수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함으로 할 수 있다. 필자의 방법은 가족을 위해 기도한 후에 나의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나 개인이 저절로 머리에 떠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중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치유의 기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은 전인격적인 것으로 인격의 모든 면, 즉 육신과 혼과 의지와 마음과 감정 및 영까지도 포함된다.
치유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의학적인 수단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믿음의 태도일 수도 있으나, 영적 교만의 모습이 되기가 더 쉽다.
일반적으로 기도의 도움과 의학의 도움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고, 우리는 거기에 똑같은 강도로 의지해야 한다. 그 두 가지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1)작은 것부터 시작하라.
(2)당혹스러운 질문
기도를 받는 사람이 모두 다 치유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우리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치유의 기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다 알지 못한다. 때로 우리는 문제를 잘못 진단하는 수도 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감정적인 치유인데 신체적인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그 예다. 치유되지 않았을 때 그들의 죄 때문이라든지, 믿음이 없어서라든지 라고 말하지는 말자. 오히려 기도하는 우리의 믿음의 결여나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역사가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언제나 긍휼을 베푸는 것이다.
안수는 믿음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근거가 확실한 사역이다. 안수 그 자체로는 병자들을 고치지 못한다. 병자들을 고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안수는 우리의 믿음을 촉진시키고 하나님께 치유의 기회를 드리는 순종의 행위일 뿐이다. 바울은 분별없이 안수하는 일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다. (딤전5:22)
(3)네 가지 단계
치유의 기도에 대한 접근 방법
첫째, 들어야 한다. 이것은 분별의 단계이다.
둘째, 구해야 한다. 이 단계는 믿음의 단계이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셋째, 믿어야 한다. 이것은 확신의 단계이다. 즉 전인격적으로 믿는다.
넷째, 감사해야 한다. 이것은 감사의 단계이다.
19.고난의 기도
기도의 형태 중에 전적으로 다른 사람 중심의 형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난의 기도이다. 눅 23:34의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사죄의 말씀을 하셨을 때보다 구속을 위한 이 고난의 사랑을 더 잘 보여 주는 것은 없다. 목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치료하는 고난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에게 은혜와 고난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대속적인 고난을 통해 다른 이들의 죄와 슬픔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함으로써 변화된다.
(1)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난의 기도의 가치는 무한하다. 우선 그것은 어떤 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는 피상적인 신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또 하나의 가치는 고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고 민감해진다는 것이다.
(2)어떻게 해야 하나?
이 세상에는 고난이 잇다. 그러나 우리는 실천의 문제, 즉 이 세상에 있는 고난을 어떻게 하면 구속과 치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우리는 모세의 본을 따라야 한다. 다니엘의 본을 따라야 한다. 다니엘은 그가 자기만 안전하고 의로운 위치에 따로 덜어져 서 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백성들의 죄와자신을 밀접하게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셉과 스데반, 마리아, 등 성경은 히11:38에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난은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하여 그들의 죄와 슬픔을 의식적으로 어깨에 짊어지는 것이다.
소극적 측면에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많은 시련들이 포함된다. 이럴 때 우리는 끈기 있게 견뎌 내야만하며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한다.
고난의 기도야말로 능력을 배양시킨다.
고난의 적극적 측면에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그들의 슬픔과 애통을 자발적으로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포함된다.
(3)다른 사람을 대신해 드리는 회개
고난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회개하는 은혜를 받을 때 가장 두드러진다. 특히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자유케 하며 그들을 대신하여 회개할 때 더욱 그러하다.
(4)하나님과의 씨름
하나님도 자신의 거룩함과 화해하기 위해 자신과 씨름하신다. 죄를 참으실 수 없으시며 다른 한편으로 죄악된 인류에 대해 무한한 사랑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우리가 가장 깊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 때문에 가장 열정적으로 논쟁한다. 투쟁은 사랑과 병행한다. 투쟁이야말로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금식은 바로 상처받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해서 싸우는 우리의 투쟁을 그 어떠한 것도 멈출수 없다는 징표이다.
필자는 우리의 금식을 우리가 고난을 기쁘게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강조한다.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무게를 지니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5)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그의 교회 안에 거하신다.
20.권세 있는 기도
권세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어떤 것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하여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명령하는 것이다.
(1)과감한 시도
고통을 향해 과감하게 명하라.
(2)권세와 동정심
이 기도는 오늘날 너무나 남용되고 오용되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는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때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행사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동정심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잘못 연결시킬 때에 종종 권세 있는 기도가 지나치게 도를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권세와동정심이 상호 배타적인 것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두 가지가 아름답게 조화되었다. 권세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동정심이 필요하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권세를 행하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3)분별력과 신중함의 보조 레일
권세의 기도를 바르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영적 분별의 은사와 신중함이라는 기본 덕목이 있어야 한다. 분별력은 성령의초자연적인 은사이며 신중함은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중심 덕목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분별력은 실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며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행하여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다.
루이스(C.S Lewis)는 ‘신중함이란 실제적인 상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그 일의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 일부러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중함이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부족한 덕목이다. 어떤 이들은 일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권세를 깨닫게 되면 모든 좋은 지각과 좋은 예절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들을 그 모든 것이 가장 불친절하고 가장 파괴적인 방법으로 일어나도록 명령하고 돌아다닌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바르게 행동하셨다. 그의 가르침도 일상적이며 ‘평이하고 실제적인 상식’으로 가득차 있다.
(4)바람아, 파도야, 잠잠하라.
우리는 옳고 유익할 경우 권세 있는 말도 담대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명령하는 기도이다. 이런 종류의 기도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 예수님은 명령의 기도를 직접 시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와 똑같은 권세를 위임하셨다. 칠십인을 보내실 때에도 똑같은 사명을 부여하셨다.
(5)우리의 인도자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요14:12)“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도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6)상식적인 조언
첫째, 모든 고통이 악마의 공격은 아니다.
둘째, 이 분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특별한 목소리를 흉내낸다든가 어떤 기괴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특별한 효과를 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을 다 동원한다 해도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우리에겐 의지할 만한 특별한 자원이 있다. 특정 사역을 위해서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다.
넷째,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확고하게 다루되 그 개인에 대하여는 언제나 유순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다섯째, 권세 있는 기도는 훈련된 생활 습관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경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영적 생활의 정상적인 훈련이 포함된 전반적인 생활 방식 속으로 들어가도록 돕는 일이다.
여섯째, 이 일을 수행할 때 다른 사람들과 연합해서 하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은 때때로 고독한 엘리야나 세례요한을 원하실 수도 잇지만 더 흔한 방식은 책임과 지원이 뒤따르는 공동체 속에 우리를 연합시키시는 것이다.
일곱째,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영적인 겸손함 속에 묻어 두어야 한다.
(7)하늘에서 땅으로
일반적으로 기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권세 있는 기도는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권세 있는 기도는 특별한 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늘의 자원을 가져 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아래로 향하는 기도이다.
엡1:20-22에서 바울의 의도는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권세 있는 자리에 앉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역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행하는 영적 전쟁과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자원에 대한 바울의 그 유명한 묘사에 논리적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된다. 즉 하늘에서의 권세 있는 지위(엡1장)가 우리에게 그와 똑같은 지위를 주며(엡2장), 그 결과 우리는 모든 주권과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어린양의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엡6장)우리가 권세 있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늘의 권세 있는 지위에서 비롯된다.
(8)어린양의 전쟁을 수행하라
권세 있는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수단으로서 주로 지금 현존하는 어두움의주관자들과 권세들에 대항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권세 있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어둠의 나라와 싸우는 성령의 전쟁에 참여한다. 은밀한 기도의방은 피흘리는 전쟁터이다. 바로 여기서 격렬하고 결정적인 전투가 수행된다.
그러나 음부의 문이 교회의 맹공격을 견뎌 낼수 없다. 우리가 완전 무장을 갖출 때 어둠의나라가 완전히 물러가게 된다. (엡6:13-18)
(9)우리의 권세를 사용하라
영적 전쟁은 이야기의대상이 아니라 실제 행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 전쟁을 수행할까?
먼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파괴적인 맹세를 깨뜨림으로써 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질병과 실패와 죽음을 자청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죄한다. 우리는 그 저주를 깨뜨리는 권세 있는 말을 해야 한다. 그 일은 마음과 몸과 영혼의 질병을 다스림으로써 가능하다. 질병은 하나의 적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즉 권능의 사역에서 볼 때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삶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그것을 다스릴 권세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적 전쟁은 모든 사회악과 제도적인 불의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빈곤을 보장하는 제도적인 구조에 대해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 도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부당한 법에 대해서 항거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값없이 하는 것들이다.
21.철저한 기도
(1)말씀 선지자
신학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선지자의 은사는 사도 시대에 끝났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것을 알려주는 풍부한 전례가 있다.
이 선지자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들은 모든 계층, 모든 범주에서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육을 받은 자 그렇지 못한 자, 교단출신일 수도 교단 밖의 사람일수도‘ 여자일수도, 남지일 수도 , 심지어 어린아이일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종교계에서조차중요하지도 않고 관련성도 없다 그들에게 영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영향력 있는 자리가 중요하지 않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지도력 밑에,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한번 모이고 있다. 조직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또 그 지도자들은 손으로 깨뜨리지 아니한 돌이 이 세상 나라를 부숴 뜨리고 온 세상을 가득 채울 많나 큰 산이 되는 것을 본 사람들이다. (단2장)
그들은 또한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자들이다. 그 미래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미래를 말한다.
선지자적 메신저도 중요하지만 선지자적 메시지가 더욱 중요하다. 선지자적 메시지는 철저한 생활 방식과 철저한 기도 방법을 마음속에 그려준다.
(2)영적 저항
참된 선지자적 메시지는 언제나 우리를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대한 영적 저항으로 초대한다. 그것은 영적 지하 저항 운동이다. 불의와 압제와 폭력의 세계에서 볼때 우리는 위험 분자들이다. 우리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언제나 그들의 입장을 하늘 보좌에 탄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요구해야 하며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장해야 한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 “성경적인 기도는 뻔뻔스럽고, 굽힐 줄 모르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정중한 독백이라기보다는 야외에서 열리는 바자회에서 끈질기게 값을 깎는 흥정과 더 흡사하다.” 우리의 영적 저항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시도하시는 것도 포함된다. 영적 저항은 필연적으로 모든 불의와 압력에 대한 단호하고도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게 한다. 우리의 저항의 무기를 보면, 우리가 권력과 효율과 통제에 기초한 세상과 얼마나 무관한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며,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불의와 협력하기를 거부한다. 놀라운 것은, 이 무기들은 사탄의 요새를 무너뜨리며 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만큼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3)사회적 성결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실 때 단지 질병만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방치하곤 했던 사회 속의 질병까지 고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와 삶을 통해 우리는 모든 장벽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4)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진정한 선지자적 메시지는 늘 우리에게 두 팔을 넓게 벌려 전 세계를 가슴에 품으라고 말한다. 우리는 거룩한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가지고 온 세상을 뒤덮어야 한다. 이것은 위대한 일이며 숭고한 사명이다. 우리는 개개인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열방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교회의 갱신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고 힘써 일해야 한다. 세상의 죄악들에 대해기도하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케 하는 생명의 메시지를 가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나가라고 요청하시는 참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한편으로 담대한 믿음과, 다른 한편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한다.
(5)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참된 선지자적 메시지는 언제나 우리를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초청한다. 그리스도인의 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흩어진 교회는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제도적인 공동체, 공동생활 공동체, 개인적 영적 후원공동체, 소그룹 영적 성장 공동체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중의 하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여러 면에서 상호보완적인 것이될 것이다.
공동생활이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표현이다. 공동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주요한 문제들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차 엄청난 잠재력을 보여 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다른 모델은 소그룹 영적 성장 공동체이다. 이것은 양육과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접근 방법이다.
(6)최고의 법
아가페만이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를 지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선지지적 메시지는 늘 우리를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초대한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두 계명은 이음매가 없는 한 벌의 옷이다. 진정한 영적 사랑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하고 이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사랑이 수직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 준다.
(7)참되고 온전한 기도는 ‘사랑’그것뿐
성 어거스틴은‘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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