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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헤브론 막벨라굴

동네 사람들(통하니) 2007. 6. 6. 08:15

 


헤브론 막벨라 굴 교회 전경

 


막벨라 굴

 


막벨라 굴

 


사라의 무덤

 

이삭과 리브가의 묘

 

헤브론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을 지나 약 35km 지점에 있는 전형적인 아랍인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가운데서 세겜 다음으로 가장 큰 아랍마을이다. 헤브론은 해발 927m의 고지대로서 유대지방에서는 제일 높은 지대이기도 하다. 본명이 ''기럇아르바''인 헤브론이 성경에 처음 언급된 곳은 창세기이다. 가나안에 들어온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수풀에 이르러 거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그 후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당시 헷족속인 에브론에게서 400세겔을 지불하고 막벨라 굴을 사고 가족의 매장지로 삼는다 (창23장).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을 이곳에 묻었다. 이 막벨라 굴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3대 족장 부부가 묻혀 있다고 믿고 있어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성지이다. 모세가 보낸 열두 정탐꾼은 이곳을 정탐했으며, 가나안 점령시 여호수아에게서 헤브론을 받은 갈렙은 원주민인 아낙자손을 쫓아낸다(수14장). 그리고 이곳에 유다지파를 위한 도피성이 위치한다(수20:7). 왕국 초기에는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자 다윗이 헤브론으로 와서 유다 장로들에게 의해서 왕이 되고 7년 반을 이곳에서 통치했다(삼하 2장).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이곳에서 왕이 되어 다윗왕을 모반했다(삼하 15장).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는 이곳에 에돔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마카비 혁명이 성공하고는 헤브론에서 에돔 사람들이 쫓겨났다. 그 후 헤롯 왕은 헤브론을 재건하고 건축광으로서의 기질을 이곳에서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막벨라굴의 웅장한 묘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현재의 헤브론은 사마리아만큼 아란풍이 물씬 나는 아랍인 도시이다. 거리를 걷노라면 큰 부대에 양털을 사고파는 양털가게와 양가죽을 이용해 만든 물통, 그리고 두건을 둘러쓴 아랍인 아낙네들의 모습과 풍경이 유대인사회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과 같이 여름에는 많은 비가 내리지 않으나 아침저녁 내리는 이슬을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다. 특히 헤브론 산 포도는 이스라엘 내에서도 유명하다. 또한 토산품으로서 흙을 구워 만든 꽃병에서 찻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저렴해서 기념품으로도 적당하다.


막벨라 굴(The Cave of Machpelah)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레아, 이렇게 이스라엘의 3대 족장부부가 묻혀있는 곳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아담과 하와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 59m, 너비 34m. 그리고 높이 18-20m의 웅장한 규모로 원래 있던 막벨라 굴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기독교인은 물론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다음 가는 성지요, 회교도들 역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는 까닭에 메카, 메디나, 그리고 예루살렘의 바위 돔 다음으로 이곳 막벨라 굴을 성지로 여기고 있다. 주전 20년경에 헤롯왕은 막벨라 굴을 막아버리고 건물을 지었는데, 처음 건물은 지붕이 없었다. 6세기 후반에 이삭의 무덤을 둘러 비잔틴교회가 세워졌었고 유대인들의 회당 건축도 허락되었다. 638년 아랍이 정복했을 때 비잔틴 교회는 모스크로 변했고, 1100년 십자군이 헤브론을 점령했을 때는 모스크가 다시 교회로 변했고 유대인 회당이 파괴 되었으며, 수많은 유대인과 회교인이 학살되었다. 1260년 맘룩이 헤브론을 정복했을 때 유대인의 막벨라 굴 접근이 허락되었으나 7번째 계단 이상을 올라설 수 없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헤브론을 정복했을 때 이 계단을 없애버렸으나 지금도 흔적을 볼 수 있다. 1967년 6월 7일 수요일, 낮에 이스라엘군은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탈환하고 그날 저녁 베들레헴을 정복했다. 전열을 정비하고 헤브론으로 진군을 서둘렀다. 새벽에 군대 랍비 고렘은 전투대열을 이끌고 헤브론에 첫번째로 도착한 유대인 장교를 찾았다. 이를 찾지 못한 랍비 고렌은 운전병에게 그의 차를 전투 대열 선두에 달리게 했다. 마침내 헤브론에 도착하고 항복의 깃발이 창문마다 나부끼는 가운데 6일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 없이 헤브론을 정복하게 되었다. 1967년 국방장관 다이얀은 회교인이 통제하게 두되 유대인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하였다. 67년 이후 막벨라 굴은 서로 구역은 따로 있지만 한 건물 안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예배하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또한 유대인과 아랍인의 충돌을 막기 위해 막벨라 굴 안까지 구석구석에 이스라엘 군인들이 기관단총을 메고 경계근무를 하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수세기에 걸쳐서 소규모의 유대인들은 비교적 아랍인과 평화적인 관계에서 헤브론에 살았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인 시온주의 운동과 동유럽으로부터 이주민들이 몰려오면서 아랍인과 유대인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929년 8월에 이스라엘 전국을 휩쓴 아랍인들의 난동이 있었다. 헤브론의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도망해 갔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아랍인들은 물론이요 동료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교 유대인들은 헤브론에서의 유대인 사회 회복을 목적으로 정착을 시작했다. 헤브론에 유대인사회를 재건설하려는 종교 유대인들은 목숨을 무릅쓴 극단주의자들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조직이 잘된 이들은 막벨라 굴에서 약 1Km정도 떨어진 기존 아랍인들 사회인 헤브론에 유대인 지구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지위를 높이며 확장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 약 40여 유대인 가정이 아랍인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데 이들은 헤브론 투데이(Hebron Today)라는 소식지를 발간하면서 방문하는 유대인이나 여행객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아낌없이 전달한다. 이들은 또한 국내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해외의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정치적 지지와 재정적 후원을 호소하고 있다. 헤브론의 유대인과 아랍인들 간의 갈등이 얼마나 심하고 긴장된 가운데 있느냐는 1994년 2월 한 유대인이 몰려있는 아랍인을 향해 기관단 총을 난사해 150여 명을 죽게 한데서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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