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슨의 조작극 다빈치 코드의 오류



순복음교회성령로고와 조용기목사의 절친한 친구 프리메이슨목사 베니힌의 자켓 왼쪽가슴문양

댄 브라운이 지은 이 책은 최근 여러 단체나 학자들에게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책 내용의 신빙성과 이와 관련된 자료들의 진위여부에 대해서 심도 있게 논의해 보고자 한다.


먼저 이 내용을 살펴보자.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암호’는 두 가지 거짓에 근거하고 있다. ‘오푸스 데이’와 ‘시온수도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푸스 데이의 존재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소설의 내용을 좌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시온수도회의 존재 여부에 있다.                             
그 책의 머리말에 말하기를 1차 십자군운동 직후 1099년에 설립된 유럽의 비밀단체인 시온수도회는 실제 존재했던 조직이다.   
 1975년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비밀문서’(Les Dossiers Secrets)로 알려진 양피지들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아이작 뉴턴,보티첼리,빅토르 위고,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온수도회의 수많은 명단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진술은 위조된 문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명백한 거짓이다.

실제로 시온수도회는 1099년 설립된 것이 아니라 1956년에 피에르 플랑타르(Pierre Plantard)라는 프랑스 몽상가에 의해 설립됐다. 80세로 2000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당시 아네마세에 있는 샤노빈 현장에서 도안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1960년대 그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위조된 수도회의 문서들을 등록했다. 프랑스 저널리스트인 잔-루크 샤멜은 1980년대에 플랑타르의 사기 행위를 폭로했고 그 주제와 관련된 여러 책들을 출판했다. 더욱이 그는 1996년 영국의 BBC2 방송에 출연해 모든 이야기가 허구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브라운은 이런 사실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소설에만 몰두하여 ‘다빈치 암호’를 썼다.

플랑타르는 자신이 679년 다고베르트 2세의 피살로 공식적으로 사라졌던 메로빙기안 왕조의 후손이라고 억지 주장하며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플랑타르는 1956년 6월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시온수도회를 창설했다. 그 전에는 그 단체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다. 창설자들에 의하면 ‘시온’이란 이름은 예루살렘의 시온이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 있는 몽트 시온(Mont-Sion)에 기원을 둔 말이었다. 그 수도회는 저소득층이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주택 복지를 위한 권리와 자유권을 변호하기 위해 설립됐고 1957년 해체됐다.

1950년대 중엽 플랑타르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작은 공동 부락의 사제의 후손인 노엘 코르부를 만난다. 노엘과 만난 직후 플랑타르는 이야기를 가공하기 시작했다.
1983∼84년 샤멜은 플랑타르의 부끄러운 과거를 세상에 폭로했다. 플랑타르는 1984년 7월 10일 시온수도회에서 사임했다. 1993년 티레이-잔 피에르는 플랑타르의 아파트를 조사하라고 명했고
그곳에서 플랑타르 자신이 프랑스의 왕이라는 위조문서를 발견했다. 조사가 끝난 후 플랑타르는 자신의 위조를 인정했다.]

위의 글은 모대학 교수가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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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사실 여부 또한 그가 실제로 출처한 자료가 언제 어떻게 수집했는지 기록한 것들로 확인할 수 있었다.
히에로스가모스, 이것 또한 특별한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농경사회에서 비롯된 민간 풍속신앙과 관련된 것을 삽입했다.
"[헬]hieros gamos(신성한 결혼을 의미) : 원래는 특히 근동지방에서 곡물류 농경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신화와 의식에서 풍요의 신들의 성적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적어도 1년에 한 번 신성한 사람들은 성교에 관계하는데, 이것은 땅의 풍요와 사회의 번영 및 세계의 영속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의식에 표현되고 있는 바, 히에로스 가모스의 주된 형태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과 여신의 관계이고, 둘째는 여신과 제관을 겸한 왕 사이의 관계이며, 세째는 신과 여제관 사이의 관계이다. 이 세가지의 모든 형태에 있어서 비교적 의식에 고정된 형태가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성한 행위자들을 결혼식으로 읶는 행렬이 있고, 선물을 교환하며, 그 한쌍의 정결예식이 거행되고, 결혼 축제가 열리며, 그들을 위한 방과 침대가 준비되며, 은밀한 야간의 성행위가 있게 된다. 어떤 관습에서는 이것이 신의 역할을 맡은 신성한 대행자들 사이의 실제적인 육체적 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타 관습에 있어서는 다만 상징적인 결합으로 나타난다. 몇몇 학자들은 히에로스 가모스라는 용어를 창조적인 성교를 하는 신들의 땅에 관한 모든 신화에 적용시켜 왔다. 하지만 아마도 이 용어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니키아와 가나안과 이스라엘과 희랍과 인도에서와 같이 결혼을 농업에 관련시키고 의식으로써 결혼을 상연하는 농경문화에만 국한시켜야 할 것이다. 유럽의 농경사회와 기독교의 몇몇 교리에 있어서도 이러한 의식의 잔존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히에로스 가모스의 존재를 여가장 사회에 관련시키려는 초기의 학구적인 시도는 설득력있는 것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2. 역사학 및 사본학에 근거한 다빈치 코드의 오류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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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교사 출신 작가 ‘댄 브라운’이 쓴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평소에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가 엉터리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드러났다고 큰소리 치고 있으며, 많은 신앙인들도 이 책을 읽고 믿음이 흔들리는 등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의 지식 공유 Site를 보더라도 많은 기독인들이 이 책을 읽고 상당히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며 비기독인들은 이 책의 주장에 대해 상당히 공감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이 책에서 주장하는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엉터리 주장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질까 염려가 됩니다.
따라서 제가 비록 비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다빈치 코드’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그 주장의 허구성에 대한 역사적, 사실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가질 수 있는 혼란을 정리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 논거는 ‘다빈치 코드’ 소설(댄 브라운 著, 양선아 譯, 베텔스만 출판, 2004)과 저자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모아 놓은 ‘다빈치 코드의 진실 - 해설편’(마틴 룬 著, 이주영 譯, 예문사 출판, 2004) ‘다빈치 코드 깨기’(어윈 루처 著, 이용복 譯, 규장 출판, 2004), ‘현대의 복음서 연구’(샤이먼 키스터메이커 著, 신성종 & 최갑종 譯, 엠마오 출판, 1985), ‘신의 파피루스’(C.P. 티데 & M. 던코너 著, 안병국 譯, 청림출판, 1997),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 著, 윤관희 & 박중렬 譯, 두란노 출판, 1998)라는 책들과 이 책들이 인용한 참고 문헌들을 재 인용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특히 아래 반론들은 대부분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어윈 루처’의 논지와 시카고 트리뷴 기자 및 언론인을 지낸 ‘리 스트로벨’의 논지를 활용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1. 다빈치 코드의 주장

그토록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에서 저자는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는 소설 첫머리에서 이 소설의 내용, 특히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관이 진실에 기초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이 소설의 부록인 ‘다빈치 코드의 진실 – 해설편’에서도 아래의 내용들이 진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현재 기독교에서 진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성경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4C경 조작된 산물로, 그 이전까지 예수는 단지 선지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정치적 통합을 목적으로 신격화되었다.

2) 예수는 인간에 불과하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으며, 정치범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자손은 프랑스로 대피하여 후에 프랑스 왕족과 결혼하여 메로빙거 왕조를 탄생시켰다.

3) 현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은 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에 쓰여진 원본이 아니며 4C 또는 5C 이후의 사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정치권력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당시에 정통으로 인정 받지 못하던 복음서들이 있는데, 이 복음서가 오히려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4) 중세 이후로부터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자손이 현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이를 문학 또는 예술 작품 속의 상징으로 끊임없이 표현해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대표적인 예술가로, ‘최후의 만찬’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5) 기독교 교회는 이 사실을 대중이 알게 되면 모든 권력기반을 잃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어떤 비밀조직이 이와 관련된 역사적 진실을 기록한 문서들을 밝히지 못하도록 줄곧 탄압해 왔다.
저자가 위와 같은 내용을 주장하는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 것은 1946년 이집트에서 발견된 ‘나그함마디’ 사본입니다(이 문서는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원본은 각 권마다 약 2-5C 경에 기록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 ‘나그함마디’ 사본은 현재 기독교에서 공인하고 있는 성경과는 다른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복음서입니다. 이 문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마치 인간처럼 묘사한 부분이 많으며, 또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를 부부처럼 묘사한 부분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주장도 상당한 추측에 의해 내린 결론이라는 것을 뒷부분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보며 필자가 상당히 아쉽게 생각했던 점은,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인 근거가 이 주장의 사회적인 파급 효과와는 달리 매우 빈약하다는데 있습니다. 단순히 흥미진진한 추리 소설을 넘어서서 ‘역사적 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견고한 역사적 사료가 충분히 제시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또한 이들이 제시하는 주요 논리는 현재 한국에서 주요 사이비 이단 단체로 지목되고 있는 통일교나 JMS, 신천지에서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유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격하하고, 대신에 다른 존재를 예수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방식이죠. 비유풀이 계통의 이단 단체인 통일교, JMS, 신천지 등에서 예수를 일반 목자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자신들의 교주를 마지막 시대의 목자의 위치로 격상시켜 예수와 동일한 권위를 주장하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예수를 일반 선지자의 위치로 끌어내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아내로서, 교회를 이끌어가야 하는 여신적인 존재로 격상시킵니다. (이단 종파의 교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이 글의 본래 목적이 아니므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2. 반론

1) 과연 예수는 4C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신격화되었는가?
‘다빈치 코드’의 저자의 주장대로 그 이전의 초대교회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AD 325년경 소집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이 많은 논란 끝에 근소한 차이로 예수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고, 예수를 인간으로 묘사하는 복음서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였는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진실한 기독교도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황제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일 때, 그는 거듭해서 거대한 십자가 환상을 보게 되고, 십자가를 통해 내전에서 승리하리라는 신의 음성에 순종함으로써 전투에서 이기고 황제가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어떤 역사가들은 실은 그가 이전부터 태양신 숭배자였고,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통합을 위해 국교로 인정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예수를 신격화하고 성경을 취사선택했다고 하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오직 ‘유세비우스’라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었을 뿐인데, 그의 역사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회의에 단지 회의 중재자로서 참석했을 뿐이며 자신의 주장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역사 기록에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성경의 취사선택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다는 암시조차 볼 수가 없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그 결정 사항을 20개의 항목으로 정리하여 발표했으며 아직도 그 기록이 남아있지만, 정경 문제, 즉 무엇이 정통 성경이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여러 가지 기독교 교리에 대한 논의가 오갔으며, 특히 ‘아리우스’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예수의 인성 교리와 ‘아타나시우스’라는 사람이 대표하는 기존 교회 지도자들의 예수의 신성 교리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종교 회의 이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창조된 신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에 대해 초대 교회의 많은 감독들은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신약 성경의 바울 및 다른 사도들의 서신서를 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경계할 것을 거듭 당부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뿐 아니라 2C경 교부들의 글이나 편지를 보면 영지주의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인성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후술하겠지만 대표적으로 리용 교회 감독인 이레니우스가 2C에 쓴 ‘이단 논박’은 이러한 교리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에서는 아리우스가 다시 한번 변론의 기회를 제공 받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결국 그의 주장을 이단으로 확정한 것입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니케아 종교회의에 참석한 교회 지도자들의 수는 318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의 전역에 퍼져있던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들이었습니다.
 
 저자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교리가 근소한 표 차이로 통과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318명 중 단지 5명만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교리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 중에서도 결국 단 두 명만이 서명을 거부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 AD 4C에 개최된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에도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참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증거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인 교부와 감독들이 남긴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이 점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안티오키아)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AD 110년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썼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의 제자인 서머나 교회의 폴리갑(Polycarp)은 AD112년 경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예수의 신성과 승천 및 부활을 믿고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순교자 저스틴(Justin)도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유의 주(主)이시다’고 주장했고, AD 165년 경 이 믿음에 따라 순교했습니다.
이레니우스(Irenaeus)는 AD 177년 리용 교회의 감독이 되었는데, 그는 요한복음에 대한 주석을 기록하면서 ‘성부와 성자(즉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차이점은 사라진다. 한 분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통해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이다.’고 주장했습니다.
아프리카 교회의 터툴리안(Tertullian, AD 150-212)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이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 약 250여 년간 씌어진 많은 기독교 문서들이 초기 기독교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초대 교회 신도들이 로마제국에서 황제 숭배나 다신교 사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순교했다는 사실도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다신교 국가인 로마제국은 제국의 통합과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로마 황제도 신으로 숭배해야 하는 법이 있었는데, 기독교인들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했습니다.
 
만약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선지자로서만 추종했다면, 또는 다른 많은 신들 중 하나라고 믿었다면 그들이 구태여 황제 숭배나 다신교 숭배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채 혹독하고 잔인한 순교를 택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 중의 신, 다른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참 하나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황제의 명령과 로마 법을 거부하고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유대와 로마제국의 역사를 기록한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도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그 당시 예수라는 현인이 있었는데, 그의 행위는 선했고 덕스러웠다…. (중략)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지만 그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 후 3일 만에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였다.”(요세푸스, ‘The Essential Writings’ 참조) 만일 우리가 요세푸스에 의해 기록된 로마 역사가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초대 교회가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들을 위해 50권의 성경을 필사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성경을 ‘조작’한 것은 아닙니다.
n 오히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부터 이미 현재의 신약 성경과 거의 유사한 목록의 문서들을 각 교회들이 인정하고 사용해왔었습니다.
 AD 175년경에 기록된 ‘무라토리안 단편’(Muratorian Fragment, 1740년 이탈리아의 학자 루도비코 무라토리가 발견한 고대 문서)에서는 초대 교회가 정식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책들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데, 이 문서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현재의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23권의 목록이 일치하는 것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AD 175년경에 쓰여진 ‘타티안’(Tatian)의 ‘사복음서 대조’(Diatessaron)라는 문서에는 현재의 신약 성경에 있는 4가지 복음서 만을 주제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문서는 이미 2C경에 초대 교회가 현재의 4가지 복음서를 포함한 신약 성경과 거의 일치하는 성경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위의 모든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종교 회의를 소집하기 훨씬 이전부터 초대 교회, 초기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으며 현재 교회가 인정하고 있는 신약 성경과 일치하는 성경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정말로 ‘나그함마디’ 사본이라고 불리는 고대 복음서에는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증거가 나와있는가? 

 저자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결혼을 주장하면서 내세우는 근거는 기존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영지주의’라는 이단 종파에서 사용했던 복음서들로, 좀더 정확하게는 ‘빌립 복음서’입니다. 이 ‘영지주의’ 복음서에 대해서는 그 신뢰성을 차후 자세히 분석하겠지만, 일단 과연 이 문서들에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나와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저자가 인용한 빌립 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부분입니다. 

“반려(짝)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는 제자들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다. 예수는 모든 제자들보다 더 자주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으며, 제자들은 ‘왜 선생님은 우리보다 그녀를 더 사랑합니까?’라고 물었다…. (후략)”
 저자는 이것을 가리켜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입을 맞출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그 당시 ‘”반려(짝)”라는 말이 당시에는 ‘배우자’를 뜻하고 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아람어 학자들도 동의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분석하자면, 빌립 복음서의 원본을 담고 있는 파피루스는 훼손되기 쉬운 재질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 내려온 원본에는 한두 단어가 빠져있는 것이 학자들의 분석 결과입니다.
  “그가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라고 번역된 부분도 사실 원본에서는 “그가 그녀의 ( )에 입을 맞추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보고 우리는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의 입, 얼굴, 뺨, 손 또는 이마 중 정확히 어디에 입을 맞춘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당시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도 자주 입을 맞추었다는 기록이 나와있는 것을 보면(심지어 예수를 배신했던 가룟인 유다도 예수를 팔 때의 신호로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의 손이나 뺨에 입을 맞추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에도 중동 지역에는 뺨에 입을 맞추는 관습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위의 구절이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백 번 양보해서 빌립 복음서의 기록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위의 기록이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결혼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정말 둘 사이에 혼인 관계가 있었다면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특히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그들이 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고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저자는 당시 아람어에서 ‘반려’라는 말은 ‘배우자’를 뜻했다고 주장하는데,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이 ‘빌립 복음서’는 아람어가 아닌 콥트어(고대 이집트어)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히 저자가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이 소설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당시 콥트어에서는 ‘반려’라는 단어는 친구 사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저자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또한 신약 성경의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인용해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혼인설을 주장하지만, 이런 근거들은 모두 위의 ‘빌립 복음서’의 근거보다도 더욱 더 가능성이 희박한 얘기들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했다는 주장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저자가 인용한 ‘나그함마디’ 사본에 포함된 복음서와 현재 교회가 인정하는 복음서 중 어떤 것이 더 믿을만한 기록인가? 현재 교회가 보유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기록이 사본으로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변조되거나 부정확해졌을 가능성은 없는가? 

저자를 옹호하는 ‘마틴 룬’은 ‘다빈치 코드의 진실 – 해설편’에서 ‘현존하는 신약 성경은 모두 4-5C 이후에 기록된 사본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실제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던 1C에 기록된 ‘원본’과는 많은 차이점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일단, 이 주장에 대해서도 ‘틀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보기에도 이 ‘해설편’의 저자는 확실히 역사 공부를 잘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쓴 것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 대한 사본은 크게 소나 양의 가죽을 이용해서 기록한 사본과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 습지에서 자란 파피루스 식물로 만든 파피루스 사본이 존재합니다. 현존하는 전체 신약성경의 내용을 거의 유사하게 담고 있는 양피지 사본은 3C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동일한 내용을 단편적으로 담고 있는 파피루스 사본은 빠르면 1C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많은 파피루스 사본들은 2C경 기록된 사본들이 현존하며, 현재의 신약성경에 포함된 마태복음의 일부를 기록한 모들린 파피루스는 AD 60년경(이는 예수의 제자들이 생존해있던 시기입니다.)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C.P 디테 & M. 던코너, ‘신의 파피루스’ 참조)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역사’라고 인정하는 내용은 가장 먼저 동시대인, 또는 그 시대에 가장 가깝게 살았던 사람이 역사가가 되어 사건을 기록하고, 이 기록된 원본을 다른 사람이 사본으로 베끼고, 사본을 또 다른 사본으로 베껴가면서 현재까지 내려와 현시대인들에게 당시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 기록의 신뢰성은 첫 번째로 사본의 연대, 즉 사본이 기록된 연대가 기록 대상 시대와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려있고, 두 번째로는 사본의 수와 일관성, 즉 얼마나 많은 사본이 기록되어 있으며 서로 일치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본들이 서로 다른 지리적 장소에서 발견된 것일수록 사본들끼리 더 많이 교차 검토함으로써 원본의 내용을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Metzger, Bruce M의 ‘사본학’ 참조) 

그렇다면 우리가 ‘역사’라고 인정하고 있는 문서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떨까요? 로마제국의 흥망을 연구한 독일 역사학자 몸젠, 영국 역사학자 기번, 심지어 최근에는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까지 줄곧 사료로 사용했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AD 116년 기록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총 16권으로 기록되었지만 1권부터 6권까지는 현재 사본이 1개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한 권의 사본은 AD 850년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7권부터 10권까지는 사본이 남아있지 않고, 11권부터 16권까지는 11C경에 사본이 기록되었습니다.
원본에 대한 현존하는 사본의 수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고, 그것도 시간적인 격차가 빠른 것은 무려 700여 년, 늦은 것은 무려 1000년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나 어느 역사학자들도 타키투스의 이 사본에 기록된 로마 역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고대 역사학자들이 인용하는 1C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는 그리스어 사본이 9개 존재하는데, 이 사본들은 10C, 11C, 12C에 기록되었으며, 4C에 라틴어로 번역된 사본이 존재합니다. 원본에 대한 그리스어 사본의 수는 9개, 시간적 격차는 무려 1000년 정도입니다.
번역 사본의 수는 1개, 시간적인 격차는 300년 정도입니다. 플라톤의 저술에 대한 현존하는 사본은 플라톤 사후 1300년 후에 기록된 것이고, 데모스테네스는 사후 1200년 후에 기록된 사본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 성경은 어떨까요? 가장 빠른 “완전한” 신약성경 사본은 시내산 사본으로 AD 35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현재 신약성경의 일부분이 훼손된 사본들은 대부분 3C, 즉 200-300년 경에 기록된 사본들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신약 성경의 일부만이 담겨 있는 파피루스 사본들은 2C, 3C 심지어는 1C에 기록된 사본들이 약 99개가 존재하며, 이 사본들은 현재의 신약 성경 중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서, 요한 계시록 등의 일부 기록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존하는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 사본들의 수만 보더라도 무려 5000개 이상의 목록이 존재합니다. (Metzger, Bruce M의 ‘사본학’ 참조) 더군다나, 이 사본들에서 제시하는 내용들은 부분적인 불일치점이 보이긴 하지만 기독교의 중심 교리에 있어서는 모두 일치하는 결과를 보이고 있다고 성경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실제 현재의 신약 성경에도 각 사본들 사이에 서로 다른 부분들은 난외주로 표시하여 독자들이 참고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본들의 기록 연대와 숫자를 고려할 때, 성경은 원본과의 시대적 격차가 짧으면 몇 십 년에서 길어봐야 3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으며, 서로 일치하는 사본들의 수에 있어서도 다른 역사 기록보다 훨씬 더 높은 신뢰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로마 역사와 그리스 역사 기록이 원본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면, 당연히 신약성경도 처음에 기록된 원본과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 저자가 인용한 ‘나그함마디 문서’의 역사적 가치는 어떨까요?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되어 있는 도마 복음서, 빌립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등은 현재 권 별로 약 3C - 5C에 기록된 사본 하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이 사본 외에 이에 대한 그리스어 파피루스 단편 조각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훼손 상태가 매우 심해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샤이먼 키스메이커, ‘현대의 복음서 연구’ 참조).
 이 문서들은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소위 ‘영지주의’라고 불렀던 이단 종파의 문서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영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던 종파였습니다. 이들은 또한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합일을 무척 중요한 예배의식으로 간주했습니다.  앞에서도 기술하였듯이,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에서 영지주의 교리를 비판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리용 교회의 감독인 이레니우스(Irenaeus)는 2C경 ‘이단 논박’이라는 글에서 영지주의자들의 글을 분석하고 그들이 왜 이단인지 설명하였습니다.
즉,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초기 기독교의 정확한 모습을 대변하지 못할 뿐더러, 오히려 초기 기독교에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문서들이라는 것입니다(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는 이들이 주장하는 ‘성적 합일’이 음행임을 강조하며 절대로 이들의 교리에 미혹되지 말라는 주장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2C 경에 쓰여진 ‘타티안’(Tatian)의 ‘사복음서 대조’(Diatessaron)라는 문서에도 이 영지주의 복음서들을 포함시키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초기 기독교는 이 복음서들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신약 성경의 복음서들은 이스라엘의 지리, 당시 로마 시대의 역사 및 사건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이 기록이 다른 고대 역사 기록과 상이한 점이 없는데 반해(예를 들면 헤롯 대왕, 헤롯 안티파스 등 유대 왕들의 통치,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등 로마 황제들의 통치, 유대 및 시리아, 터어키와 그리스의 지형 및 문화, 그리스 도시들의 다신교 풍습 등), 영지주의 복음서들에는 당시의 어떠한 사건도, 지리적 정보도 기술하지 않고 단지 사변적이고 선문답과 같은 내용만을 기록하고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빌립이나 도마, 마리아가 기록했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급진적인 역사학자나 사상가들도 이 복음서들이 정말로 빌립, 도마, 마리아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 이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그 당시 다른 역사 기록에 의해 입증되었던 예수의 행적이나 역사적인 사건(예를 들면 예루살렘 입성, 빌라도에 의한 재판, 십자가 처형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초대 교회가 인정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전혀 상반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4) 과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가? 
저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의 우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자처럼 생겼고 가슴이 불룩하다는 점을 들어 막달라 마리아가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권위 있는 예술 학자인 시카고 예술학교의 브루스 바우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플로렌스의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만찬은 성찬용 잔인 성배보다는 유다의 배신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마찬가지였다고 하는데,
그는 가룟 유다의 모습을 고민 끝에 제일 나중에 그려 넣었다고 합니다.
요한의 얼굴을 마치 여자처럼 그린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뿐 아니라 당시 플로렌스의 다른 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여자처럼 아름답게 생겼다고 하는 것이 당시의 속설이었기 때문입니다. (Bruce Bucher의 2003년 8월 New York Times 평론 기사 참조) 가슴이 불룩해 보이는 이유는 당시의 유대 옷이 통으로 된 것이고 목 부분에서 박음질이 되어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자세히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옷도 가슴 부분이 약간 불룩하게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템플 대학교의 미술사 교수였던 잭 워서만 역시 저자의 이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Patrick R. Reardon의 2004년 2월 Chicago Tribune 평론 기사 참조) ‘다빈치 코드’ 역시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하는 식의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5) 과연 어떤 비밀 조직이 저자가 주장하는 모든 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과학적인 문서들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는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보 공개를 탄압해 왔는가? 

저자는 소설 속에서 기존의 신약성경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복음서 사본이 발견된 것을 교회가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러한 이러한 사본들로서 20C 중반에 사해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과 앞에서도 설명한 ‘나그함마디 문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의 이 주장 또한 저자가 고대 사본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은 구약성경에 대한 사본을 담고 있어, 복음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서들이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의 신약성경이 발견된 것을 교회가 은폐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 '사해 사본'은 카톨릭이나 개신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보관되고 있으며, 학자들에게 널리 공개되어 있어서 교회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나그함마디 문서’ 또한 학자들에 의해 모두 번역되고 연구되어서 ‘영지주의 복음서’라는 이름으로 영어로까지 출판되었습니다.
즉, 저자가 교회에 의해 은폐되고 있다는 두 사본은 사실상 오래전부터 일반에 공개되어 연구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중세의 카톨릭 교회가 성경을 독점하고 이를 일반 신도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종교 개혁으로 모든 성경의 내용은 일반 신도에게 공개되었으며, 현재는 어떠한 고문서들도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번역되고 출판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치 기독교의 성경이 조직적으로 위조된 문서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상 그런 문서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3. 결론

역사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신뢰는 더 높아져 간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은 예수의 행적과 그의 교훈에 대해 목격한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원본은 아니지만, 사본들과의 시대적 간격이 현존하는 어떤 고대 역사 기록보다 짧고 사본 숫자들도 훨씬 더 많고, 또한 사본들 간에 중심 교리에 대한 놀라울 만한 일치성을 보이고 있으며, 그 밖의 다른 고대 역사 문서들과도 배치되는 점이 별로 없습니다.
즉, 예수의 행적과 교훈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기독교의 기본 진리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 – 는 먼 훗날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진정한 복음(‘기쁜 소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수 백명의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만일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거짓 증거함으로써 큰 권력이나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면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잡혀서 처형당했을 때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후에는 예수의 부활 신앙을 전함으로써 오히려 수치(예수가 처형당한 십자가는 로마 시대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내리는 형벌이기 때문입니다.)와 조롱을 당하거나 더 심하면 잔인한 형벌과 핍박을 받고 순교해야 했습니다.
혹자가 말하듯이 집단적인 환상이나 집단사고(Groupthink)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일까요? 많은 심리학자들은 환상은 철저히 개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개인적인 환상과 특히 집단사고(Groupthink)는 긴 시간 동안의 시련이 주어질 경우 결코 지속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 심리학협회 의장을 지낸 저명한 심리학자인 게리 콜린스 박사의 주장도 이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렇게 로마인들로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순교를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유대교 극단주의자들에게 몰매를 맞고, 지적인 헤라인(그리스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생명을 예수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 속에서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역사적인 잣대를 가지고 해체하고 분석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