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1 < 회복을 위한 수순> 호 6:1-2
☺한석봉과 어머니-여러 종류의 패러디(재미로 만들었지만 부모의 세대가 자녀의 세대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어야 한다)
현시대의 젊은 이들이
人生 亡-이 세대는 망했다라고 한다 현 세대의 절망적인 삶에 대한 말이지만 →회복이 되어야 함
※ 부모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1)회복의 시작
진정한 회복은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데 있다
예) 탕자의 비유
?※여호와께로 돌아가면 삶이 회복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병을 고쳐 주세요 라고 기도 한다고 과연 병이 낫는가?
?※과연 돌아 가면 회복이 있는가?
돌아간 것 같은데 회복이 손에 안 잡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
❤2)회복의 목포
진정한 회복은 여호와를 아는데 있다-여호와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4. 5절-)
?너희가 돌아온 것이 참인가?
※ 하나님이 원하시는 돌아 옴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자로 사는 것 이다(6절)
여호와를 제대로 알고. 붙잡고 사는 것이다
?•안다는 생각에 젖는 게 아니라 말씀에 충만하여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예)나오미→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다
?•나오미가 들어서 아는 것 →고향 사람들은 잘살더라
?• 고향으로 돌아와 체험으로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여호와에 대하여 아는 것→ 체험이 있어야 한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소유하고 아는 대로 살아가는 것→ 삶을 통하여 아는 것 (체험)
→ 새벽 빛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보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이길 힘이 된다. 극복할 수 있다
또 어떤 환경에서도 찬송할 수 있다
?예)다니엘 →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반드시 이루어 주심을 알고 있었다
롬8:30-39-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자가 없음→회복
❤3)회복의 통로
진정한 회복은 인애의 사람을 통해 이뤄진다
회복의 통로→ 6절
?인애→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의 사랑( 믿음의 사람들을 통한 사랑)
?•하나님과의 통로
헷세드(인애)의 사람들
나오미의 헷세드→룻.보아스
고멜의 헷세드→호세아
내 자녀의 헷세드 → 부모(행동으로 보일 것)
김장환 목사의 아들 →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에 감동 받음→ 아버지의 삶에 감동ㅡ아들 김요한
---삶으로 가르친것만 남는다---
이 책은 김장환 목사님의 아들 김요셉 목사가 기독 초등학교를 설립한 후 집필한 책이다.
김장환목사님은 어릴 적 칼 파워스 상사 라는 미군을 만나 미국으로 건너가 목사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른 청년들 중에서도 반드시 나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김장환 목사님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칼 파워스 상사가 될 수 는 있다.
상대방이 훈육할 때는 상대방의 훈육의 방법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절대로 아이들 보는 앞에서 아이들 편을 들어주지 않기로 했지.
상대방의 훈육에 대해 잘못을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아이들을 재워 놓고 단둘이 이야기하자고.
아버지는 내게 오뚝이처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심어주셨다.
어머니는 난관을 피할 수 있는 쿠션을 제공해주지 않았다.
가시밭길을 걸을 때 발바닥이 따끔따끔하다고 나를 업어서 기르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부모님은 내 절름발에 길을 맞추지 않고, 평평한 길에 내 절름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셨다.
요셉아, 네가 심긴 곳에서 꽃을 피워야 해. => 내가 심긴 곳은 어디일까.
왜? Becuase of Jesus!
엄마 왜 예수님 때문에 있어?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어.
그래서 나를 구원해주셨지.
예수님은 네가 변하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하셔. 네 마음속에 있는 아픔과 미움도 용서하셔.
"예수님이 죄인인 저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요. 지금 제 곁에 오셔서 다 낫게 해 주세요"
아이의 문제를 자신의 힘으로 풀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 가져간 것. 나는 아직도 어머니의 그 지혜에 감탄한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말로 써 줄래?
얘들아 요셉이가 한국말을 참 잘하지? 너희도 선교사가 되려면 다른 나라 말을 이렇게 잘해야 하는 거야.
정작 중요한 것은 교수법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4~15)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그 아이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 부모도 교사도 늘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부모의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아이의 성격을 보완해 줄 수 있을 만한 것을 생각해보라.
어머니는 자녀 셋을 기르시는 동안 아무런 외부활동을 안 하셨다. 아버지의 돕는 배필 역할을 충실히 하셨다.
자녀 셋이 다 자라고 나자 중앙유치원을 세우신 것이다.
아버지는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계셨다. 그 때 나는 아버지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말았따.
나를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하나님, 저는 아버지처럼 훌륭한 목사는 될 수 없지만 저렇게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참 배움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 삶에서 얻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삶으로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저를 완벽한 설계 속에서 창조하셨군요."
기독교 교육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기독교 세계관에 바탕은 둔 학교가 함께 교육해야 한다.
어떤 자격증 없이도 부모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부모. 가정과 교회와 학교가 함께 하나님의 자녀를 양육하는 모델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내가 보는 관점을 사람 중심의 색안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변화시키기는 것이 기독교 교육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볼 때도 인본주의로 본다. 우리는 말씀을 보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은 내가 성경을 바로 볼 수 있게 하신다. 성경과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내 삶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이것이 기도와 말씀이 늘 같이 가야 하는 이유이다.
개교할 때부터 우리는 채플과 성경 시간은 아예 없애기로 했다. 하나님을 채플과 성경 시간에 가둬놓을수는 없기에, 힘들지만 삶과 신앙의 통합의 길에 들어서기로 했다. 수업의 시작을 기도로 열고 끝을 기도로 마무리하는 것.
어린아이라고 기도와 말씀의 기준을 낮게 잡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혹시라도 어른들의 어떤 기준이, 그 교육태도가 아이들의 영적 체험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하잠멈(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하는 기도) -> 회사에서 하잠멈 할 수 있는 시간? : 엘리베이터, 이동할떄, 기다릴때.
기도를 율법적으로 하지 않았다. 다만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움직이는 것도 소화시키는 것도 , 심지어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기도했다. 죽는 순간까지 죄를 고백했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과 육의 자녀들을 위해 이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자녀들에게 진리와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지만, 기도로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오히려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낼 수도있습니다. 그냥 기도하게 해주시고 그냥 무릎꿇게 해주십시오.
기도가 최후 반응이 아니라 최우선의 반응이다. 기도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도록, 삶에서 기도가 중심이 되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이다.
흔히들 일반 학생이 장애 학생을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장애 학생이 일반 학생의 성숙을 돕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사랑을 통해 배운다.
창세기1-2장을 유심히 살펴보라. 하나님은 천지를 7일동안 창조하셨다. 7일째 안식까지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안식이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일하시려고 쉬신 분이 아니라, 쉬기 위해 일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다시 일하기 위해 쉰다. 휴식은 재충전의 시간일 뿐이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대표적인 인본주의적 시각이다.
인간의 일그러진 죄성 때문에 우리가 쉼을 포기했고, 예수님의 초청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쉼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했고, 쉼을 왜곡했다.
멈춘다는 것은 인간인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정기적인 고백인 것이다. 정기적으로 멈출 때 피조물의 원래 목적이 회복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닌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르느니라.
토요일 저녁이 되면 촛불을 켜는 것으로 안식일을 맞이한다. 그리고 아주 맛있는 만찬을 먹는다.
만찬이 끝나는 순간부터 주일 저녁식사하기 전까지, 안식일 촛불을끌 떄까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하는 일이라곤 찬양과 기도뿐이었다. 그리고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쉬기 위해서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
일중독자나 다름없었던 내게는 그것이 훈련이었다.
샘물이 고이려면 그냥 놔둬야한다는걸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너를 사랑해서 쓰는 거야. 너는 있는 모습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용납받는 존재야. 존재 자체로 내게 너무 귀하단다.
필요를 채워 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하는 존재가 되길 원하신다.
쉼. - 대화(식사),책(독서) , 놀이 - 3가지로 연결
하나님의 창조성은 여유와 안식에서 비롯된다. 충분한 안식, 충분한 누림 속에서 아이들은 무한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책도 여백이 있어야 만들어지고 읽혀지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안식이 뿌리를 잘 내려야 열매를 맺는다.
쉼의 가치를 회복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음표보다 중요한 것이 쉼표이고
그림만큼 중요한 것이 여백이다.
미술교육을 할때.
1. 자기 손으로 그리면서 관찰을 통해 창조의 원리를 발견한다
2. 제한을 준다 -> '자유롭게 맘껏 그려봐' 하고 이야기하지만, 질서 없는 자유는 혼동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은 물감에 물을 섞지 마' 처럼 그림을 시작하기 전에 경계선을 지어줘야한다.
3. '선이 용감하구나' 하고 과정에 대해 칭찬하라
4. 색칠하는 책 주지 마라 -> 선 안에 정답의 색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기 때문이다.
5. 동화를 들려주고 그림 그리기를 시켜라
집에서 양육의 역할을 등한시하고, 돈이나 벌어다 주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처럼, 교회에 헌금하고 자녀의 영적 양육은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은 자녀의 영적 상태에 대한 책임을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묻지 않으신다. "너의 자녀를 내가 분부한 대로 예수를 닮은 모습으로 양육하였느냐" 부모에게 물으신다.
"교회가 잘못되면 다른 목회자를 구하면 되지만 내 자녀들이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져줄사람이없소"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따면 아버지의 자리가 1차적인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았다면,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다른 것은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1. 정기적인 가족 시간을 가진다. -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 뿐 아니라 송편만들기, 가족놀이를 해도 좋다. 우리 가족에 예수님이 있다는 것을 심어준다.
2. 가정의 주기를 교회 절기에 맞춘다. - ex) 어머니가 크리스마스 4주 전부터 들려주는 마리아와 요셉과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의 기억 ->가정의 전통으로 만들라
3. 예배를 축제로 즐겨라 - 예배는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녀가 생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유도한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 세가지만 말해볼래"
4. 식사를 예배로 기념하라
5. 하루에 한번 자녀를 축복하라 - 하나님은 가정의 제사장인 아버지에게 자녀 축복권을 이미 주셨다. 그것으 사용하고 사용하지 않고는 당신의 선택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9:9)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
신체적,인지적,사회적,영적인 성장 +인지적,도덕적
손바닥을 보자. 영성은 측정할 수없다. 영성은 이 다섯가지영역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신앙적 고민을 너무 쉽게 해결해주면 안된다. 질문을 무마시키지 말고,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스스로 신앙 갈등을 겪도록 해야한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갈등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진리를 믿는 것이다. 진리를 의심하는 것도 믿음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도 믿음이다. 믿음에도 스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패러독스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크리스천의 실존이다. 앎에 대한 작은 힘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통로가 되었다면,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앎이 더 넓어질 것이다.
학부모는 아이에 대한 계획을 갖고 잇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판단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께 나를 위탁받은 자로서 되는 대로, 그럭저럭 나를 키우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계획을 갖고 나를 훈련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로서 교육의 주권을 회복하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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