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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백 배 더 독재했습니다 --친구 메일중에

동네 사람들(통하니) 2010. 10. 4. 10:15

 

***** 이 자료는 '연규탁'님께서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인요한(John Alderman Linton)박사의 강연] : 자료가 좋아 다시 보내드립니다.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John Alderman Linton)박사의 강연
썸네일
인요한 : 한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인 인요한 박사
삼대가 선교를 했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우리 조상들은 한국을 많이 도왔지만 저는
 거꾸로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저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 여기 앉아계십니다.

5·16혁명과

박정희 대통령의정책 때문에 .하나님께 제일 감사하고,

 대한민국을 잘살게 한 박정희대통령에게 철이 들고 난

 후에야 감사함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전라도에서 그 당시에는 김대중 선생을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좀 난센스 같지만 .

 제가 노대통령 취임 5일 만에  이북전문가로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이제는 . 얘기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 확인시켜드리는 일입니다..

노대통령이(무현) ‘무슨 말을 해야 이북에 대해서 이해를 하실까?’

엄청 고민을 하고.

. 노대통령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북의 상황은 집안에 정신박약아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상황이 골치 아픕니다. 그러니까 .
10년, 20년 갈 수 있는 아주 단단한 정책을 펴셔야 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정책을 펴시면 안 됩니다.

냉정한 이성으로 정책을 펴십시오.” 이렇게 제가 얘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제 얘기를 딱 10분 듣고 질문을 . 하는 거예요. “우리가 잘하면

그이들도 우리에게 잘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하면 핵도 포기하고···”

 

그 사람들 핵 포기 안 합니다. 절대로 포기 안 합니다.

숨어서 몰래라도핵을 만듭니다.”했습니다.

남쪽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한테 잘해 주면

그.들도 우리한테 잘할거라는 그런 오해, 그런 잘못된 생각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분 얼굴이 벌겋게변하고 누구를 부르더니

담배를 갖다달라고 하더라고요. ‘., 그날 저는 혹시 한국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 그런데 제가어렸을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말라’ 새마을 사업을일으키면서도

“우리는 잘 살 수 있다!”.그 생각과 그 사상이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게

 아닌가 . 생각을 합니다.


박정희, 근로자, 어머니… 남한을 일으킨 3대 힘
.

개성에서 평양으로 차를 타고 올라가는데 ..

안내원이 “남조선이 우리보다 좀 앞선 것을 얘기해보라우!”

그러더라고요, .‘좋다. 무엇이든 물어봐라, 다

이야기해주마.’ 이런 심정을 가지고

이 사람한테 40분을 강의를 했어요.

 

첫째, 우리가 잘사는 까닭은 박정희 때문이다. 박정희 다음은

당신 정주영 알지 않느냐?

정주영만 있는 게 아니었고 거기 이병철도 있었다.

박태준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박정희로부터 특명을 받고

특혜를 받고 엄청난 공장들을 세우고 국가를 발전시켰다.

나는 전라도에서 컸기 때문에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쁜 사람인 줄알았다.

그러나 너무 너무 너무 잘 몰랐다.

박정희가 위대한 사람이었다.. 중국이 오늘날 잘살게 ! 된 것도

박정희를 공부했기 때문에 저렇게 잘산다.

중국도, 싱가포르 이광요도 박정희사상을 배운 사람들이다.

박정희는 위대한 사람이다..

뭐 인권문제 가지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데 기본 생계가

보장되어야 인권도 논할 수 있는거다. 남조선에서

보릿고개를 없애 준사람, 그게 박정희다.”

두 번째, 잘살게 된 까닭은 남쪽에 있는 근로자들 때문이다.

구로공단에서 16시간씩일했다. .잘 살려면

돈을 모아야 된다. .. 그래서 돈을모으기 위해서 16시간씩 공장을 돌리고 심지어 . 여자들이 머리카락까지 팔았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겪었다.

 

세 번째, 남조선이 잘사는 이유는 한국의 여성들 때문이다

근면·절약정신. 당신한국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아냐?

그건 공감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여자들이근면·절약 정신교육.

이런 걸 우선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


네 번째 여자들! 우리 어머님들 때문에 잘산다.

그렇게 얘기했더니 이 양반이뭐 좀 시큰둥해요.

줄 잘 섰디뭐? 갑자기 그러는 거예요. .

그래서 거 무슨 얘기요?했더니

 

남조선 아이들은 미국 뒤에 줄섰고,

우리는 소비에트 러시아 뒤에 줄 서가지고 이렇게 돼버렸다.

중국 얘기는 하지도 안합디다.

그래서 내가 그 .보고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필리핀은 미국 뒤에 백 년 전에 줄을 섰는데

왜 이렇게 못살죠? (웃음)

한국 사람들에게 아부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말합니다.

미국에 이민가면 한국 사람들이 1년이면 80% 이상이 새 차를 사요.

5년이면 80% 이상이 새 집을 마련해요. 미국 사람들은

30년이 돼도 그걸 못해요.대단한 일입니다.

제가
좋은 얘기 많이 했죠? 나쁜 얘기 좀 해도 되겠죠?

지금 한국 사람들이 보수와 진보, 좌와 우,

모든 사람들이 소모를 하고 있어요.

성숙하면 타협을 해야 돼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돼요.

 

링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보다 백 배 더 독재했습니다.

신문사 300개 닫았어요. 주의회를 재판도 안하고 연금을 시켰어요.

대법원장 불러 가지고 “당신 까불면 감옥에 넣어 버리겠다!”했어요.


남북이 나눠지고 전쟁이 날 것 같으니까 링컨조차도

그런 극단의 처방을 냈어요.

미국 사람들은 사람의 업적을 평가할 때 '시대성'을 감안한

평가를 하는데, 대한민국은당시의 '시대성'은 배제하고서

오늘의 잣대로 옛날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박정희 대통령은 기념관이 없어요. 이거 바뀌어야 됩니다.

미국사람들은 링컨이 잘못한 부분은 땅속에 묻어 버렸어요.

미국 방문해 보셨죠?

워싱턴 링컨기념관에 가보면 링컨이 예수님 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되어 있어요. 아쉽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 업적을 냈을 때,

이순신장군 어떻게 했어요? .왕이 감옥에 넣어 버렸어요.

 

그렇죠? 사촌이 땅을 사면 유태인들은 잔치를 벌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세력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에 배 아프기는커녕

잔치를 벌여야 될 일이에요.

남 잘 된 것을 축복해 주고 축하해 주고 그런 문화로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세브란스에서 공부 잘 못하고 해서 꼴등하다시피 했는데

미국에 가서는 세브란스에서 교육받은 덕분에 제가 중간이 아니라

우수한 쪽에 들어갔어요. 그게 세브란스 교육이에요.

나가서 힘을 겨뤄보니까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


박정희 어른이 기초를 닦은 대한민국의 희망을 얘기하겠습니다.


첫째 희망은 조선사업입니다. LNG선을 영하70도,

그 액체 LNG를 보관할 수 있는 조선소 기술이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최고입니다.

1 위예요. 특허가 있어서 흉내도 못 내요. 극비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포항제철에서 박태준의 후배들이 지금 철을 만들어내는데 전세계적으로 거치는 코크스
(Cokes)라는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철을 만듭니다.

 아무리 철 값이 떨어져도 생산능력 있고 수익이 남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IT산업. 전 세계에서 고속인터넷이 제일 완벽하게 깔린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게 제 마지막 비판이자 칭찬입니다.
삼성전자가 지난 5년 동안에 소니(Sony)를 앞섰는데

최대 10년을 앞섰답니다

.

삼성, 대단한 기업입니다. 누가 만들었죠? 기아자동차가

미국의 최악 불황일 때 최악의 지난 1년 동안 미국자동차

시장점유율을 6% 올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북한의 실상

얘기가 너무 길어지면 재미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한테

이북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선택을 잘못해 가지고 이북이 어떻게

저렇게 망가졌는지 전쟁 전에는 평양이 서울보다

더 잘 살았다고 그래요.

전기도 남아돌아가고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는지

김일성이 이렇게 나왔어요.

머슴과 지주를 없애겠다

그 사회는 머슴과 지주가 당원하고 인민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97%가 소위 인민입니다.

 

3%가 소위 그 사람들이 없애겠다는 지주 쪽에 들어갑니다.


그걸 아셔야 돼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통일이 아쉬운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이산가족! 지금 나이들이 많아요.

이산가족들이 그 유일한 인맥이에요.

여러분 우리 집사람이 중국으로 . 북한의사들을 데리고 나와서

교육을 시켰어요.

최고 3일 정도 교육받다가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이런 것 가르치지 마세요. 우리는 마취할 시약도 없는데

이런 것 배워 봐야 머리만 아픕니다.

그리고 돌아갈 때 28개의 뇌물이 필요합니다.

우리 집사람이 깜짝 놀랐답니다. ..

무슨 뇌물이 필요하냐? ..

뭘 요구했을 것 같아요? 돈? 선물? 유에스비

(USB:컴퓨터 이동식 저장장치)입니다.

남조선 사극을 좀 담아 달라. 최대한 가능하다면 지난 것까지도

담아 달라. 최신 것. ”, “이거 가지고 가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총살 아니냐?” 그랬더니

 

아~ 일 없습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지우고 들어가서

파일을 복구시키면 돼요.” 그러니까 세관 통과할 때

누가 보면 없는 걸로 되어 있고….

래가지고 거기에 있는 고관들한테 최고 인기선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끝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2003년도 쯤 되는데…무쏘車를 사서 1년 반 만에 폐차를 시켰어요. .

비포장도로 마천령 고개를 넘고…. 함경남도, 북도 사이에

일제시대 때 길이 그대로예요. 변한 것 하나도 없어요.

이북호텔은 평양을 떠나면 정말 지내기가 힘듭니다.

청진 관광 려관’에 도착을 했어요. .

우리는 남의 돈을 모금해 가지고 오니까 제일 싼 방 주세요.

그러면 그 쪽 얘기는 항상 똑같아요.

3등실 돈 가지고 일등실에서 주무세요.” 호텔 선임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위대한 장군님이 주무셨던 방에 가서 .자라.

그래서 . 호기심에 갔더니 몇 월 며칠 위대한 장군님이

거기서 주무셨답니다.

다음 .목욕을 하고 싶어요. 비포장도로로만 열 몇 시간을
달렸으니

머리에다가 흙을 한 삽 올려놓은 것 같아요.

 

 

그래서 프런트에 가서 “나 목욕을 좀 하고 싶은데 더운물…

말하니까 “우리 십 분씩 쏴주겠습니다.

얼마나 고마운지...그래서 호텔방에 올라와서 7시5분 전부터 옷

다벗고 목욕탕 앞에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세 가지 장비가 필요해요. 바케쓰가 하나 있어야 돼요.

그걸 목욕탕 속에 잘 빠트려야 돼요. 사회주의 국가는요,

목욕통 청소를 안 해요. 밑에 진흙이 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찬물을 받아놓고, 그거는 화장실용 물이거든요.

그 다음에 세숫대야 하나 놓고 바가지 갖고 기다리는 거예요.

그런데 영락없이 딱 정각이 되면 물이 나와요.

‘물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걸 또 빨리 받아내야 합니다.

왜? 녹물이에요. 관이 오래됐거든요.

그 다음에 더운물 갖고 목욕을 시작했는데 여러분은

거짓말 같으실 텐데요. 거짓말 아닙니다.

갑자기 세상이 새까만 거예요. 정전이 된 겁니다.

온 호텔방을 기어 다니며 배낭 속에 플래시를 찾는데

한 3분 걸렸어요. 찾아가지고 왔는데 처음에 3분 보냈죠,

찾는데 3분 보냈죠, 그래서 한 3분밖에 안 남았어요.


소중한 이 국가를 잘 지켜야 합니다.귀국해서 나중에에

연희동 공중목욕탕에 갔는데 아주 불이 훤하더라고요.

갑자기 청진 생각이 나는 거예요.

찬물도 퀄퀄 나오고 더운물도

퀄퀄 나오고…. 제가 벽을 보고 혼자서 울기 시작했어요.

너무 너무 고마워서,

마음껏 목욕하는 거 한 번도 고맙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

그냥 눈물이 나는 거예요. 아버지 장례식 때도 안 울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소중한 메시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깔아놓은 바탕에 대단한 국가를 세우고,

우리가 가진 것이 엄청 많아요. 우리 다 재벌 같이 삽니다.

여러분들이 손자손녀, 여러분 자녀한테 다 얘기해야 됩니다.

여행갈 수 있는 것, 자기차 운전 할 수 있는 것, 친구 만날 수 있는 것,

가서 통닭하고 생맥주 마실 수 있다는 것, 따뜻한 방에서 자는 것,

여름에는 다 에어컨 켜고 지내는 것, 여러분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이 국가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나라를 우리가 잘 지켜나가야 됩니다.

<연사약력>
1959년 12월 8일 생 국적 미국
1987.2.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
2003.8.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
1988∼1991 미국 뉴욕주 Catholic Medical Center of Brooklyn Queens

          가정의학과 수련의 과정 이수
1991∼현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부교수

 

 

 

한국에서 못세운 한국의 영웅 박정희 기념비, 독일에서 세워진다.

 

'박정희 독일연설 기념비' 건립한다written by. 최경선  

함보른 눈물의 격려사-근대화 위해 몸부림친 한국 현대史의 한 페이지로 후손이 마땅히 기억해야

 

   1964년서독 뤼브케 대통령(70)과 박대통령(47) 의장대

                   사열 (서독 본 도착)konas.net

우리 1인당 GDP 80달러였던 시절,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 돈을 꾸기 위해 서독을 방문했다. 비행기조차 구하기 어려워 서독 정부에서 보내준 국빈용 항공기를 타고 갔다.
1964 12 10 오전 1055 독일(당시 서독) 북서부 루르지역 함보른 탄광의 한 공회당.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묻은 300여명의 한국인 광부, 한복차림의 한국인 간호사, 독일인들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났다. 박대통령 일행이 강당으로 들어가 대형 태극기가 걸린 단상에 오르자 광부들로 구성된 브라스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다.
박대통령이 선창하면서 합창이 시작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차츰 커지던 애국가 소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목부터 목멘 소리로 변해갔고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에 이르러서는 울음소리가 가사를 대신해 버렸다.

 대통령 부부, 300여명의 우리 광부와 50여명의 간호사 모두가 어깨를 들먹였다.

밴드의 애국가 연주가 끝나자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여러분.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 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고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박대통령은 연설원고를 옆으로 밀쳐버렸다.

"광원 여러분, 간호원 여러분. 모국의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던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결국 대통령은 연설을 마무리짓지 못했다. 본인도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 바다’로 변했다
.

박대통령은 참석한 광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파고다 담배 500,갑을 전달한 뒤 강당 밖으로 나왔다
30 분 예정으로 들렀던 광산회사에서 박대통령 일행이
강당 밖으로 나오는 데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함보른 광산 회사측에서는 박대통령에게 한국인 광부가 지하 3, 000m에서

캐낸 석탄으로 만든 재떨이를 기념으로 선물했다.

 

박대통령과 육여사는 울어서 눈이 부어 시선을 바로 두지 못했다.

 박대통령은 차중에서 눈물을 멈추려 애쓰고 있었다.

나란히 앉은 뤼브케 대통령이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칠순 노인인 뤼브케 대통령이 사십대 후반의 젊은 대통령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었다.

그리고 우정어린 격려를 했다. 

 

"울지 마십시오. 잘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해서 경제부흥을 이룩합시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경제 건설뿐입니다." 이것은1964년 12월 10

 서독 루르탄광지대에서 있었던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다.

63년 파독(派獨) 광부 500명 모집에 4 6, 000명이 몰려들었다.

 상당수가 대학졸업자와 중퇴자들이었다. 당시 남한 인구 2, 400만명에

정부공식 통계에 나타난 실업자 숫자만도 250만명이 넘었다.

이런 시절이니 매월 600마르크(160달러)의 직장에 지원자가 밀려드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루르탄광 지하 1, 000m 3, 000m 사이 막장에서 1m 파들어

갈 때마다 4~5마르크를 받았다.

66 12, 3년의 고용기간을 채우고 142명의 파독광부 제1진이

 귀국했을 때 거의 전원이

1회 이상의 골절상 병력을 안고 있었다. 사망자도 있었고,

 실명한 사람도 있었다. 간호사의 사정도 비슷했다.

 

66 1 128명이 독일로 떠날 때의 고용조건은 월 보수 440마르크(110달러)였다.

독일 땅에 도착한 한국 간호사들이 처음 맡았던 일은

알콜 묻힌 거즈로 사망한 사람의 몸을 닦는 작업이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서베를린에만 한국 간호사가 2, 000명이 넘었다.

66~76년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가 130, 광부들은

 63~78년까지 7, 800여명이 건너갔다.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 000만달러로 한때 GNP 2%대에 달했다.
그 아픈 역사를 뒤로 하고 오는 12 10일 근대화·산업화를

위해 몸부림치던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함보른 현장에 '박정희 전 대통령 연설기념비가'가 세워진다.

현재는 뒤스부르크시의 한 시민체육강당으로 쓰이는 곳이다.

기념비 설치를 추진하는 신용석(69) 아시아올림픽평의회 부회장은

"그 강당은 우리 현대사에서 반드시 기억돼야 할 곳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그 장소를 제대로 기억하는 이가 없었지요.

저도 찾으리라는 기대없이 무작정 찾아갔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동네 노인들이 당시를 또렷이

기억하며 위치를 알려주더군요."라고 말했다.


기념비에는 박 전 대통령의 연설문이 한국어·독일어로 넣어진다.

신 부회장은 1970년대 신문사 특파원으로 일하며 파독(派獨) 광부들의 삶을 취재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고국으로 돈을 보낸 광부들에게 대통령이 찾아와

 눈물의 격려사를 한 곳을 후손들이 마땅히 기억해야 할 장소라고 설명했다.

신 부회장과 연설기념비 건립위원회 측은 작년 에센 지역에 들어선
'광부기념회관; 지원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 회관은 독일에 정착한 광부들 모임인 재독 한인 글뤽아우프
(행운을 빈다는 광부들 인사말)가 세운 것으로
상당수 광부가 미처 찾아가지 못한 퇴직연금이 여기에 쓰였다
우리 정부도 독일 정부가 보내온 연금의 주인을 수소문했지만,

 끝내 주인을 찾지 못한 돈에 3억원을 보태 20억원을 보냈다.

 

회관에는 당시 파독 광부들이 썼던 장비와 기록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1960~70년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독일로 광부를 보냈지만,

이후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서 독일에 기념관까지 만든 민족은 한국뿐이다.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데는 100여년 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부터 파독 광부·간호사와

중동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해외에 나가 피땀 흘린 이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난의 역사를 가진 조국을 소중히 지켜가는 것만이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진 과제이자 책무다. (konas)


2010-08-25 오전 6:10:12  코나스 최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