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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9/17/일요일 <호칭을 바꿀 수 있는교회> 사도행전 2장 1절-2절

동네 사람들(통하니) 2012. 9. 19. 15:41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목사님의 의도를 잘못 이해 했을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문젯점--- 숫자 불리기에만 급급하다 

 

 눅 1장 3절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 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 "데오빌로"를 부를 때 '각하'(주 밖에 있을 때)라는 존칭을 붙였음---

  4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본문>

사도행전 1장 1절-2절(존칭을 붙이지 않음)

 

1절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눅1;3)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절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1) 복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주 안에서의 생활이 되게 해야 한다.

        현재의 교회는 세상과 너무 같거나 더 추하다.(모범이 되지 못할 때)

        세상의 궁전 같은 삶을 살다 자녀에게 세습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교회의 현실이 세상보다 더 추하다.

        교회가 너무 거륵해서 못오는게 아니라 세상보다 더 추한게 많기 때문에 안나오는 것이다

                     교회는  허무한 삶의 종지부를 찍는 곳 이어야 하며

                                     하늘의 가치를 부여하는 곳 이어야 하며

                                    세상의 정체성 보다 복음 안에서의  정체성이 확실해야 한다.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예수를 주어야 한다.

                                           (행3;6. 은, 금이 아니라--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됨)

                                         눅 1 ;3에서 주 밖에 있을 때 데오빌로 '각하'(이스라엘 정무를 집정하는 총독부 집정관)로 불리던 사람이

                                                         본문에서와 같이 그냥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변화 받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어야 한다.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청할 때 호칭이 변할 수 있다 라는 전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새로워 져야 한다

                                         인간적 계급을 떼고 들어 올 수 있어야 한다.

                                      복음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이어야 한다

 

  2)  복음안에 들어오기 까지는 사회의 위치를 인정 해 주는 교회여야 한다.(데오빌로 각라 로 불렀던것 처럼)

            세상 사람들은  갈 길을 밝혀주는 교회이기를 바란다

                                 가장 인간적이기를 바란다

                                       예수님--나사로가 죽었을 때 땅을 치고 통곡하심

                                 ♥  스스로 인간 계급장을 떼고 들어오게 될 만큼 성숙된 신앙으로 자라게 해 주기를 바란다

                                  절대적인 멧세지를 전하되 상대의 입장도 충분히 살필수 있기를 바란다. 

                                         다니엘--왕의 메뉴를 거절하였지만 왕을 위한 매너를 잃지 않음

                                                    (왕이 보낸 음식을 먹지 않고 채소만 먹어도 됨을 10일간 시험하게 함)

                                       바울; --우상의 제물을 먹었을 때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올무가 될 수 있음을 말함

                                              고전 8;9절-그런 즉 너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10절 -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김제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이자익 목사 이야기

 

                                                                  http://cafe.daum.net/njnewfountainchurch/--가져온곳
       100년 전 이 땅은 희망을 잃어가는 듯했다.

      서양 열강들의 침략과 일제에 의한 탄압으로 정국은 불안했다.

      헐벗고 굶주리는 민중은 늘어만 갔고,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렀다. 그럼에도 이 땅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파란눈의 선교사들이 전해주는 복음 때문이었다.

      말씀은 사망을 이기고 억압된 마음을 풀어주는 밝은 빛이요, 자유였다. 복음은 희망의 땅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10∼11)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차, 봉건적 유교문화를 뛰어넘어 헌신과 섬김의 본을 보여준 주의 백성들이 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교회를 설립한 조덕삼(1867∼1919) 장로와 이자익(1879∼1958) 목사의 얘기다.

  조 장로는 이 지역 용화 마을의 유지였고,

  이 목사는 그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머슴이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교회를 세웠을까.

  1904년 봄, 말을 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던 테이트(한국명 최의덕·1862∼1929) 선교사는

 중간 지점인 용화마을에 머물곤 했다. 그는 당시 사교(邪敎)의 고장이던 금산에 교회를 세우고 싶었다.


그날도 용화마을의 제일가는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온 조덕삼은 "그렇게 살기 좋은 당신의 나라를 포기하고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왜 왔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테이트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이라고 화답했다.

유교 정신에 투철한 보수집안의 조덕삼은 헌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한 테이트 선교사의 용기에 감동했고,

이후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다.

경남 남해도에서 태어난 이자익은 17세 때 조덕삼을 만났다.

 6세 때 부모를 잃고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이자익은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남해도를 떠나

  걸어걸어 금산에까지 왔다.

첫눈에 이자익의 영특함을 알아본 조덕삼은 그를 마방의 마부로 일하도록 했다.

무학의 이자익은 고개 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이 부리는 머슴이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신앙생활도 같이했다

 


조덕삼, 이자익이 함께 믿음을 키운 지 3년이 지난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 투표를 했다.

묘하게도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신분의 양극화가 뚜렷했던 그 시절 주인과 종이 경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투표 결과는 놀라웠다. 이자익이 주인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술렁이는 성도들을 향해 조덕삼이 겸손히 말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장로보다 낮은 직분으로 교회의 살림과 행정, 설교를 맡아서 함)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를 뽑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자익은 장로가 된 뒤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 강단에서 설교했고,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성실히 섬겼다. 조덕삼은 자신의 종을 장로로 섬겼을 뿐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됐다.


조덕삼은 교회를 신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땅을 헌납했다.

 이 교회는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ㄱ자 양 날개 부분에 남자와 여자 성도들을

따로 앉도록 했고 출입문도 양쪽으로 냈다.

예배 도중 남녀가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가운데 휘장을 쳤다.

ㄱ자 양쪽 선이 만나는 중간엔 목사가 서는 강단이 있다.

강단 뒤쪽에 목사들이 출입하던 쪽문은 '겸손'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다.

테이트 선교사가 교회에 들러 이 쪽문을 드나들 때면 늘

 "주께서 겸손을 저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금산교회는 1908년 부활절을 지내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금산교회는 전북문화재 136호다. 한국 전통 사회의 남녀 구분이라는

큰 과제를 해결한 것과 함께 이 교회는

더 큰 의미를 안고 있다. 바로 지주와 머슴의 이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훗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당시 조덕삼은 이자익을 담임 목사로 청빙하자고 적극 나섰다. 조덕삼이자익을 정성으로 섬겼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교단에서 세번씩이나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으로 이름을 알렸다.

금산교회 100년째 아름다운 신앙의 뿌리를 이어오고 있다.

조덕삼의 아들이 2대째 금산교회 장로로 섬겼고,

그의 아들도 3대째 이 교회를 섬기고 있다. 바로 4선의 국회의원, 주일대사를 지낸 조세형 장로다.

그는 한달에 한번 금산교회를 방문해 예배를 드린다.

                                                                               

 

이 글을 읽는 모든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