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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자의 권세(5,6)--Kenneth E. Hagin 지음 김 진호 옮김

동네 사람들(통하니) 2006. 6. 3. 17:48
LONG
제 6 장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약간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하여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썼던 것과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의 성도들에게 새롭고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골 1;15~20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땡에       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      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게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      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      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      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제 2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의해 살아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골 2;12~15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       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2절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으키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일을 행하신 분이 아버지였다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13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심과 동시에 우리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예수께서 죽음에 순복하셨을 때 우리에 대한 율법의 보석금은 지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는 그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 서 있던 깨어진 율법과 계명들을 도말해 버리셨습니다. 그는 이제  무효화된 보석금을 그의 아들의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구원을 이루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 다른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반대하던 마귀의 권세들과 악령들을 망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은 죄의 값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죄를 대속하셨을 때 사탄의 공중 권세는 그들의 권리를 행사하여 예수님을 그들의 능력 아래 두려고 하였습니다.

                       권세의 열쇠들
 
  성경은 사탄이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정복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1;1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 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귀로부터 열쇠를 빼앗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열쇠는 인가된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권세에 대한 열쇠입니다.
  우리는 육체적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죽음은 아직도 우리의 원수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죽음은 우리가 정복하고 밟아야  할 마지막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 당신의 새로운 몸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당신이 현재의 육체를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되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친구가 이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따지 길래 “바울도 실패했는데 당신도 포기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나는 누구든지 그이 현재의 몸인 육체로써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몸은 반드시 변화 받아야만 합니다. 당신은 이 현제의 몸으로는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바로 우리가 변화 받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한 순간 살았던 우리의 몸은 변화를 받아 죽지 않을 몸이 될 것입니다. 그 때 까지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오직 제한된 능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것이었던 권세에 대한 마귀의 권능을 무장 해제 시킨 후 그리스도께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골 2;15)
  여기서 바울의 말씀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대로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다루었던 주제인 “그리스도께서 그의 원수들 위에 높이 사 아버지의 오른 편에까지 앉아 올 리우셨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사탄의 권세의 정복과 사탄을 무찌른 아버지의 일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모든 권능들 위에 앉아 계시며 하나님 보좌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교회가 전체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 머리는 그의  계획을 수행을 전적으로 그의 몸에 의지한다는 것 - 즉 우리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공중 권세들에 대한 권세의 행사는 그의 몸을 통해서만 한다는 것 - 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이 예수께서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8;18)고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전에 이해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땅위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 몇 명은 가끔 한 번씩  권세에 관하여 약간의 계시를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걸려 넘어지듯이 권세에 부딪혀 넘어졌다가는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권세를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 방면으로 영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내가 스스로 “우리가 가지고 있으나 모르는 권세가 무엇일까? 라고 자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감사하게도 우리가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거절하거나 허락하는 것에 대하여 하늘이 뒤를 보장해 주고 있다는 것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였지만 우리는 우리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부분의 상황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 상황에 대하여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동하기까지는 결코 아무것도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을 때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나는 네가 내게 무엇을 말하든지 시행하겠다.” 라고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 번은 주님께 그 사람이 2~3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주님은 ”네가 그렇게 요청하였으므로 그렇게 해주겠다. 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내 자녀들이 내가 시행하도록 하게만 한다면 땅 위의 아버지보다도 나는 더 많은 것을 내 자녀를 위해 해주기를 원하고 있단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해주기를 원하는 육신의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의 보좌 위에 앉아 계시는 폭군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무엇인가 잘못을 범하는 그 순간 당신을 후려쳐서 파편처럼 날려 버리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버지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승귀(承句 exaltation)의 의미와 우리가 아버지의 오른 편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계획을 방해받아 오고 계십니다. 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러 오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한번은 성경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지고는 “이제 성령님을 소유했으니 성경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성경을 떠나서는 진리를 좇아 성령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는 순간 당신은 너무 멀리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머무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았고 거룩한 사람들이 그것을 기록하였습니다. 하님의 말씀만이 최고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먼저 당신의 머리로 성경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가슴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성령을 말씀 위에 두지 마십시오, 말씀을 첫 번째로 두고 성령을 두 번째로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유명한 오순절 편집자이며 스미스 위글위쓰 전기의 저자인 스탠리 프로드샴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었고, 두 번째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멋진 조화를 이룬 사람입니다. 
ARTICLE

이책은 점자책을 만들기 위해 타이핑된것입니다.

 

제 5 장


   권세의 행사

 

  권세의 행사로 들어가는 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했던 두 구절의 기도를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즉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20)와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입니다.
  이 두 기도를 묵상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법으로 배우십시오. 이 기도가 당신의 내적 인식의 일부가 될 때까지 이 진리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기도가 당신의 삶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정신적으로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는 마십시오. 당신은 반드시 영 안의 계시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사탄의 영역 아래 있는 모든 권능들을 능가하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으키셨으므로” 역시 그 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앉아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위에”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를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을 때 우리도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앉았을 대 우리도 앉았습니다. 위치로 말하면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앉아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오른 편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앉으신 행동은 당분간 최소한 그의 일이 연기된 면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어진 모든 권세는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 그의 일을 수행하므로 그 분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는 그의 일의 한 축면은 마귀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없이는 이 땅 위에서 그의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는 나 없이 사실 수 있지만 나는 구분이 필요합니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분 없이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분도 당신 없이는  지내실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에베소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그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몸이 “나는 머리 없이도 지낼 수 있어요. 나는 머리가 필요 없습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머리 없이 지낼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의 머리가 “글쎄, 나는 나의 목이 없어도 지낼 수 있어, 나는 그 나머지 부분은 필요 없어, 나는 손이나 발 따위는 없어도 지장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우리 없이는 지내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만 수행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일은 우리와 떨어져서 결코 행해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또한 그 분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6;12 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 구절을 그 위치에서 떼어내어 우리가 마귀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며 마귀의 힘이 얼마나 센지 만을 묘사한다면 당신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전체 요점을 놓친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이 편지를 썼을 때는 그가 장과 절을 나누어 쓰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학자들이 훨씬 뒤에 우리들이 참고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나눈 것입니다.
  당신은 가끔 한 장에서 한 절만 끄집어내거나. 그 상황에서 떼어내어 취급하여 원래 그 구절이 의미하지 않는 바를 말하도록 함으로써 큰 해를 끼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바울을 통하여 제 2장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이 모든 권능들 위에 우리가 앉아 있다는 것을 이미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권능들 위에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도 같이 앉히셨으므로 우리도 그 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수와 그의 군대와의 전투에 있어서 우리는 저들보다 위에 있으며 그들을 능가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께서 저들을 이겼으므로 우리도 저들을 이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승리도 우리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수행해 나가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다루기를 거절하셨던 귀신

 

 

  1952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상 가운데 제게 나타나서 약 한 시간 반 가량 마귀와 귀신과 귀신들림에 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환상의 끝 부분에 가서 작은 원숭이나 님프같이 보이는 한 악한 영이 예수님과 나 사이를 뛰어 다시면서 연기막이나 어두운 구름 같은 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귀신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야케티 약, 야케티 약. 애케티 약”하면서 위 아래로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그의 말씀하시는 것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이 정의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위 깊게 본다면 당신을 괴롭혀 왔던 많은 것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왜 그 귀신이 그토록 소란을 피우도록 내버려 두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내가 직접 들을 수 있도록 그 귀신을 꾸짖으시지 않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나는 몇 분간 잠자코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그 귀신에 대항하여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고 계셨으나 나는 그가 말씀하고 있는 바를 한 마다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꼭 들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귀, 귀신들에 대해 어떻게 권세를 사용하는 지에 관하여 내게 가르쳐 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혼자 ‘주님은 내가 듣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는데 그걸 다 놓치다니...’ 나는 거의 하얗게 질렸습니다.
  나는 매우 절실하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더러운 영아,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멈출지어다.” 내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 작은 귀신은 마치 소금자루처럼 바닥에 꼬꾸라졌고 검은 그름은 사라졌습니다.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입을 닥칠 뿐만 아니라, 예수 이름으로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하자 그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아셨습니다. ‘왜 그 귀신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을까? 왜 그런 일을 허용하셨을까? 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나를 보시며 “만일 네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행동을 치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할 수 없었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게 정말 큰 충격이었고 나를 매우 놀라게 하였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 하셨지요?”하고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다, 만일 네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 행동을 취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할 수 없었지” 라고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부분에 대하여 강조하며, “아니다, 내가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 없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주님, 저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결코 내 평생에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없고 설교를 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환상들을 통해 주님을 보았다고 해도 주님께서 이것을 최소한 신약 성경의 세 개의 성경 구절을 통해서 내게 증거 해 주셔야만 한다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약 아래 사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아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내게 네 개의 성경 구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제가 신약성경을 150번 읽었고 많은 부분은 그보다도 더 읽었는데 그런 것이 거기 있는 줄을 내가 모르다니요! 라고 말했습니다.


            마귀를 상대하기

 

  예수님은 “아들아, 성경에는 네가 모르는 것이 많이 있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신약성경에는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나 예수님께 마귀에 대적하여 무엇을 해 달라고 구하라는 말이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사실 그런 기도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믿는 자가 마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너희가 그렇게  할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마귀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자기에게 속한 권세를 행사하게 되어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은 믿는 자들 스스로가 마귀에 대하여 무엇인가 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작은 지체도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마귀에 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믿는 자가 마귀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고는 많은 분야에 있어서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권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가장 작은 지체도 다른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마귀에 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을 믿기 시작할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우리의 일을 시작하게 되는 때입니다.
  “나는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 와서 사슬을 가지고 그를 결박한 후 무저갱에 던져 넣을 때 까지 (계20;1~3) 마귀에 대하여 내가 할 일은 모두 다 했다”라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제 내가 이 사실을 증명하는 네 개의 성경 구절을 주겠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죽음에서 살아났을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28;18)라고 말했다. 여기서 권세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즉시 땅위에서의 나의 권세를 교회에 위임하였단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교회의 머리로서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머리는 당신의 몸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권세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게 주신 성경구절은 마가복음 16;15~18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어떤 믿는 자든지 - 어떤 목사나 어떤 부흥사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 첫째로 언급된 표적은 그들이 귀신들을 쫓아낸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내 이름으로 마귀에 대하여 권세를 행사하게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는 마귀에 대한 나의 권세를 교회에게 위임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13에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우리를 흑암에서 건져내 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다른 번역본에는 “흑암의 권능으로부터 건져내 사”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권능은 권세를 의미하는 희랍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건져내 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흑암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흑암, 즉 사탄과 그의 나라에 대하여 말할 권리가 있고, 그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 명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
다.

        
            다른 것들에 대한 권세의 행사

 

  마귀가 그들의 삶이나 그들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가운데 어디에 있든지 믿는 자들은 마귀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마귀의 권능을 부셔 버릴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그럴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마귀에 대해서 권세를 행사할 권리가 있으므로 적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는 자들이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마귀를 쫓아내란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그들(믿는 자들)이 우선적으로 그들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에 대하여 권세를 행사하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나의 집안에 대해서는 권세가 없지만 당신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영적 권세란 자연적인 권세와 매우 비슷합니다. 
  예를 들면 당신은 내 돈에 대해서는 권세가 없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이상 나에게 내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하라고 말할 권세가 없습니다. 당신은 나의 자녀들에게도 권세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의 삶에 있어서 마귀의 역사를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지만 항상 마귀를 쫓아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집안에 대하여는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중보기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가족 가운데 영적 권세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으로 주신 말씀은 야고보서 4;7이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이 문장의 암시된 주어는 ”당신“입니다.). 믿는 자는 마귀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믿는 자에게 마귀에 대하여 무엇을 행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마귀가 예수님으로부터 도망간다고 말하지 않고 마귀가 당신으로부터 도망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손을 얹어줄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손을 얹어야 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주의할 것은 손은 머리에 있는 지체가 아니라 몸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당신이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을 때 당신은 마귀에게 권세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 권세는 당신이 그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든지 못 느끼든지  당신의 것입니다. 그 권세는 당신의 기분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행사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서의 말씀을 내게 주시고 그 환상이 사라진 후에 나는 “피하다(flee. 도망하다)”란 단어의 의미가 깊이 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전을 찾아보았는데, 이 단어의 뜻 가운데 하나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다(to run from in terror)" 였습니다.
  그 때서야 나는 내가 본 환상 가운데 마귀가 왜 흐느껴 울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겁에 질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나는 다른 귀신들이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행사할 때에 두려움 가운데 온 몸을 벌벌 떠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나를 겁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대표하고 있는 예수님을 겁내는 것이었습니다.
  환상 가운데 예수님은 마귀에 관하여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또 다른 성경 구절을 내게 주셨습니다. 이 세 번째 구절은 베드로 전서에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썼습니다.
  당신의 대적이란 당신의 반대자를 위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마귀가 나를 쫓아온다. 라고 합니다. 그들은 마귀가 그들을 따라 잡지 못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이미 마귀에게 잡힌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벌써 기도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지 않습니까? 그러면 마귀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뒤로 벌렁 누워 죽은 척하면 되겠습니까? 모래 속에 우리의 몸을 숨기고 마귀가 사라지기만을 기대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 읽어가며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주목해 봅시다.
  다음 구절은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시험과 시련)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 표준 번역에는 “믿음” 대신에 “너희 믿음” 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 번역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전 가운데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제 바울을 사용하셔서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손수건이나 헝겊 조각을 던집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여러분들이 바울에게 편지를 써서 손수건 한 장씩을 구하십시오. 라고 하지는 않았다.” 고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그들에게 마귀에 대하여 무엇인가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마귀에 대한 권세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당신이 할 수 없는 무엇을 당신에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이유는 믿는 사람은 누구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인에서 소유했던 똑같은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오직 바울만이 귀신들을 쫓아내거나 바울이 우리를 위하여 마귀를 대적해 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바울에게 해달라고 하겠습니까?)


               어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기 

 

  사람들은 언제나 왜 자기들은 병 고침을 받지 못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의 치료를 위해 기도해 주었던 설교자에게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그들이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는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업히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하나님은 그 어린 아이가 자라고 걷고 무엇인가 스스로 행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어린 아이를 내려놓으시고 걸으라고 하시지만 많은 어린 아이들은 걷지를 않습니다. 어린 아이로 남아 있기를 바라며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돕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자라서 자신들의 권세를 사용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서는 그들 스스로의 권세를 사용해야만 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아내와 내가 집회에 참석하는 동안에 어떤 부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결혼 전에 우리 교회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낳은 지 몇 개월 밖에 안 되어 탈장이 된 어린 남자 아이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의사들은 그 아이를 수술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탈장이 마르고 진멸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며칠 안 되어 탈장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그 아기는 수술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아기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헤긴 형제님, 제가 비판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는 젊은 사람들만이 신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신유를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오기 전에는 우리 아기를 위해서 누구의 기도를 받아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믿음도 점점 더 강건해져야 합니다만 그렇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녀의 교회에는 다른 많은 교회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어서 구원 받았고,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난 올바른 가르침이 부족하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장 발전에 있어서 어린이 단계에 계속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대는 병 고침을 받곤 했었는데 지금은 안 된다” 고 합니다. 이는 마치 당신이 언제나 나남의 옷만 입고 살고 자기 자신의 옷은 가져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당신의 믿음으로 권세를 행사해 보지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기도하지 못하면서 언제나 남의 기도에만 의존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시도해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만 의존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방금 얽었듯이  “...너희 대적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마귀에 대여 무엇인가 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야고보, 베드로는 마귀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27에서 “마귀로 틈은 타지 못하세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내게 주신 성경구절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은 네가 네 안에 마귀에게 장소를 내어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귀는 네가 그에게 허락하지 않는 한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네가 마귀에 대하여 권세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땅 위의 권세

 

  “여기 네 개의 증거들이 있다. 내가 첫째요, 둘째는 야고보, 셋째는 베드로, 바울이 네 번째다. 이 증거는 믿는 자가 땅위에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왜냐면 내가 땅위에 있는 너희들에게 마귀를 능가하는 나의 권세를 위임하였기 때문이다. 네가 마귀에 대하여 아무 것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이다”  라고주님은 설명을 추가 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왜 일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권세를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알지 못하고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마귀가 무슨 일이든지 그가 원하는 것을 계속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허락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의 기도 방법을 바꾸어야 하고 마귀를 꾸짖어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바꾸는데 손해 볼 것은 없습니다. 바꾸는 것이 당신에게 유익합니다. 우리는 이를 행할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정사들과 권세들보다 훨씬 높이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권세를 행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1;22~23은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발은 몸의 지체이지 머리의 지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 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존 에어 맥밀란이 저적했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 발바닥이나 발톱, 새끼발가락이 된 자들 - 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던 강한 세력들보다 훨씬 더 높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누가복음 10;19에서 예수께서 다른 70인의  제자들을 내어 보내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것이나, 어떤 설교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면 마귀는 어느 누구보다도 크고 이 세상의 신이므로 이 세상 체계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는 우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그동안 너무 오래 우리를 짓밟고 다녔습니다.
  이것이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하여 가벼운 농담을 할 만큼 어리석었습니다. 어떤 큰 모임에서 나는 한 목사님께서 “글쎄 해긴 형제! 마귀가 달리고 있다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나도 달리고 있고 마귀가 내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일세! 라고 제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마귀로부터 쫓김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마귀가 당신으로부터 도망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마귀를 도망가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너무나 오랫동안, 사실 대부분의 세월을 설교자나 교회의 모습이 이러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이런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왕으로서 통치하기

 

  자, 로마서 5;17을 다시 한 번 봅시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확대된 의미로 번역된 성경(The Amplified Bible)에 의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그 분을 통하여 삶 가운데 왕들로 통치할 것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계획은 우리가 삶에 있어서 왕들로서 다스리며 지배하는 것, 즉 환경· 가난· 질병 등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세가 있으므로 다스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스립니다.  내세에 말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 세상에 있어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거나 말하려면 그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 되는가 확인합시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하기를  “여기 나는 더위와 추위 속을 거지처럼 정처 없이 떠도네.”라고 하거나  “존귀하신 예수님, 나를 잊지 마세요,”라고 하며 모든 종류의 불신앙을 노래합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니므로 거지처럼 방황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으로 상속받을 자입니다.(롬 8;17),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악령들 위에 훨씬 높으신 권세 있는 자의 우편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혀졌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이는 거지가 할 소리가 아닙니다. “존귀하신 예수님, 나를 입지마세요”나 “내가 그것을 겨우 할 수만 있다면”이나 “어느 그늘 아래 서서 당신은 예수를 발견할 것입니다.” 혹은 “주여, 영광의 땅 한 구석에 나를 위해 작은 오두막집 하나 지어주소서”등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는 이 따위 노래를 듣느니 차라리 당나귀가 우는 소리를 듣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노래가 진리인 듯이 너무나 오래  불러왔습니다. 사람들은 “거지처럼 정처 없이 떠돌며”를 부를 때 눈물이라도 조금 흘리면 그들은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너무도 자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새들처럼 눈은 꼭 감고 입만 벌리고 행동합니다. 누구든지 다가와서 무엇이든지 입에 넣어주면 그것을 잘 받아먹을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입을 열고 눈을 감고 있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꼭 다물겠습니다.


         겸손 대 가난

 

  예를 들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난과 겸손을 동일시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언젠가 제게 다른 목사님께서 매우 낡은 중고차를 운전하고 계신다면서 그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냐고 제게 말했습니다. 저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무식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낡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그 목사님의 겸손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당신도 알다시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한 번도 캐딜락을 타본 적이 없다” 고 합니다. 그 때는 캐딜락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나귀는 그 당시에 캐딜락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그들이 가졌던 최고의 운행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아서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을 마귀가 빼앗아 기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에 찌들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인생을 왕들로서 다스리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가난에 찌든 왕을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가난이란 단어는 왕이라는 말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가족 가운데 권세를 행사하기

 

  하나님은 마귀가 우리 가족들을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렸을 때에 마귀는 그들에게 병을 주려고 힘썼습니다.  나는 마귀에게  화가 나서 말하기를 내 자녀들에게서 손을 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마귀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의 영역을 다스리고 있다. 네가 이 집안을 다스리고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스린다.” 라고 했습니다. 나는 마귀를 쫓아내었고 그는 달아났습니다. 당신도 마귀를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수년 전 미국 북부 지방에서 내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날 밤중에 나는 잠을 깼습니다. 나는 내 영으로 누군가가 육체적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가 바로 중보 기도할 때입니다.
  나는 주님께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여쭈어 보았고, 주님은 나의 형님과 관계있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나는 그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조용히 약 한 시간 반 가량 방언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나의 기도는 내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의 잠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승리의 낌새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방언으로 매우 조용히 찬양을 드린 후에 잠들었습니다.
  이틀 후에 나의 여동생이 텍사스에서 내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녀는 매우 흥분이 되어 울고 있었습니다. “터브가 사고를 당해 그의 척추를 다쳤어요.”라고 외쳤습니다. “눈뜨고 볼 수없는 모습이고 캔사스에 있어요. 의사들은 그가 살아날지 죽을지 모른대요.”라고 말했습니다.
  “잠깐만, 진정해라. 그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같이 그렇게 심한 상태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치료하셨단다. 나는 이틀 전에 그에 대해 기도했고, 벌써 나는 응답을 받았단다.” “응답 받았다니요?  ”그래, 나는 응답을 받았다니까. 그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마라, 그는 곧 나을 거야“
  이틀 후에 그녀는 다시 내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녀가 터브의 상태를 문의해 보았을 때 그는 등에 석고들을 댄 채로 병원을 걸어서 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들이 예견한 대로 죽지도 않았으며 전신마비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텍사스 가란드에 있는 우리 집에 매우 좌절하고 풀이 죽어서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가 그가 없는 사이에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주일 아침에 나는 나의 본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우리와 함께 가자고 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겨우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어린 아이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도중에 나는 갑자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서 바로 내 앞에서 형제가 어떤 공원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스스로 혼자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나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알아, 나는 그 여자를 죽이고 나도 자살해 버릴 거야.”
  나는 죽은 듯이 조용히 서서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가 여기 처리해야 할 작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 설교를 계속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괴롭히고 있는 마귀에게 말했습니다. “마귀야! 당장 그 일을 그만 두지 못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엄히 명하노니 그에게서 떠날 지어다! (회중은 내가 누구에게 이야기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오직 마귀만이 알 뿐이었습니다. )
  이것이 내가 말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우리가 집에 돌아 왔을 때, 그 형제는 집에 와 있었고 영적으로 좋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공원에 갔었으며 그가 스스로 자기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래, 나도 알지” 하고 내가 환상 가운데 본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무언가가 갑자기 내 위에 덮쳤고, 그러고 나서 마치 무엇인가 내 위에서 들어 올려진 것 같았어, 마치 구름이 깨끗이 거둬진 것 같았고 나는 휘파람으로 노래를 하며 집으로 돌아 왔지”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터브는 아직 어린 아이 그리스도인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어떻게 만날지 몰랐습니다.
  가끔 주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아이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어야 하며 우리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 때가 되면 그들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그들을 대신하여 무엇을 할 수 없게 됩니다
.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를 배우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기를 원하는 자리에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이 권세의 사역에 관하여 너무나 자주 실패했습니다. 그 대가로 교회는 패배의 고개를 숙여 왔으며 두려움에 쌓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1;22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예수님은 질병의 고통과 모든 악한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머리가 되십니다. 이 사실은 그 분이 이 땅 위에서 사실 때 이미 모두 증명된 사실입니다. 위의 구절을 “모든 것들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라고 말한다면 좀 더 분명해지고 깊은 의미가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모든 것의 머리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진리들을 우리의 영적인 것에 소개하고 중재함으로써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존경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참된 의미를 우리가 알 수 있는 위치로 우리를 높이실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교회도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함이며, 그를 통해서 우리가 만물 위에 권세를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속해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어 놓으신 승리의 결과를 즐길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거기에 이르지 못하도록 싸울 것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통하여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