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7:2-10
제목: 감동을 주는 리더
찬송: 447장
목표: 이웃과 예수님께 감동을 주는 리더가 되게 한다.
세월호 사건을 통해 자기를 희생하며 학생들을 살린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실망과 분노를 안겨준 선장과 선원들과 같은 리더도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감동을 주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가정, 직장, 교회, 국가 등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리더에게는 감동을 주는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리더입니다. 두 명이 모이면 그 중에 한 명은 리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 일터, 교회, 혹은 어떤 모임에서든지 모두가 리더입니다. 감동을 주는 리더가 이끄는 공동체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님을 감동시킨 한 리더가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감동을 주는 리더는
1. 신분을 초월하는 사람(2-3): 종을 감동시킨 사랑
2-3절,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마 8:8절에 의하면 종의 병은 중풍병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평소에 알고 지내던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보내어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장로들은 그가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었다고 하며 종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며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해달라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이런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신 예수님은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식민지의 노예 한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모습이 감동을 줍니다.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대부분 자기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 찾아왔을 뿐 종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는 종의 생명을 사랑했습니다. 실제로 군인은 전쟁에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적군의 목숨을 많이 빼앗는 사람이 훌륭한 군인입니다.
하지만 백부장은 노예 한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여 유대인의 장로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었습니다. 중풍병이 걸린 하인을 쓸모없다고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빈부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생명존중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번거로움을 감수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절은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사람은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었습니다. 종을 사랑하는 백부장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분과 계급, 민족을 초월하여 종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도 감동입니다.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삶 자체가 감동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며 사랑합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때 더한 감동이 있습니다. 요즘에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람은 진한 감동을 줍니다.
(예화)의인 이수현
2001년 1월 26일 일본에서 술취한 사람이 기차선로로 추락하자 선로로 뛰어들어 그를 구하고 죽은 이수현 청년에게 일본인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너를 잊지 못할거야’라는 영화가 제작되었고 이수현 아시아장학기금이 만들어졌습니다. 민족을 초월한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금도 매년 추모행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월호에서 학생들을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주검으로 돌아온 선생님들의 기사를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으로 감동을 주는 리더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화)평민과 결혼한 영국 윌리엄왕자
2011년 4월 29일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와 동갑내기 여자 친구 케이트 미들턴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케이트 미들턴은 350년만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 영국 왕실 며느리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습니다. 윌리엄왕자의 결혼식이 세간의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감동적인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인간이 되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입니다. 신분과 계급을 초월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왕자가 평민을 사랑하여 결혼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인이 하인을 사랑하여 병을 고쳐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여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신분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로마 백부장은 신분을 초월하여 종을 감동시켰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종은 자신의 병을 고쳐준 백부장의 사랑에 감동하여 이후에 충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백부장처럼 신분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감동을 주는 리더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가족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부하직원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직장상사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교회에서 주의 종과 다른 성도들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 속한 공동체 일원들께 감동을 주는 리더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통념을 초월하는 사람(4-5): 유대인을 감동시킨 배려
4-5절,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백부장은 통념을 초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통념이란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는 개념’을 뜻합니다. 당시의 사회적 통념은 유대인에게 로마군인은 원수였습니다. 나라를 점령한 점령군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로마 백부장을 두둔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과 유대인 장로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님께 와서 백부장을 칭찬했습니다. 그의 요청을 들어달라고 예수님께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가 식민지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로마장교는 사랑이 없고 유대인을 멸시한다는 통념이 깨어졌습니다. 이방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생각도 깨어졌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 직접 나가는 것을 감당치 못하여 장로들을 통해 정중히 부탁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사회적 통념을 초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보낸 장로들은 그가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었다고 하며 종의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백부장은 유대인 장로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식민지백성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어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잘하는 성품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집으로 오시는 예수님께 친구들을 보내어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했고 예수님을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성품과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사회적 통념을 초월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당시의 다른 로마의 백부장들이 가진 생각과 행동을 했다면 종과 유대 장로들을 감동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화)바자회
지난주에 여전도회 주최로 ‘인도고아원 및 선교센터 후원을 위한 바자회’가 열렸습니다. 우리 민족도 아닌 멀리 인도에 있는 고아원과 선교센터를 후원하기 위해 여전도회 회원들이 땀을 흘렸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아원과 도움을 베풀어야 할 곳이 많은데 왜 인도까지 돕느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것도 감동을 주는 일이지만 통념을 초월한 감동을 주지는 못합니다.
바자회 수익금으로 인도의 고아들과 선교센터를 돕는 일은 통념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다른 민족, 얼굴도 모르는 한국의 성도들이 사랑의 수고를 했다는 것을 알 때 그들은 감동할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 사랑하는 일을 했지만 인도인들에게는 통념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감동을 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백부장도 로마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 땅에 살고 있는 로마인들을 위해 봉사하면 로마인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더 높은 계급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유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로마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도 유대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백부장이 유대인들에게 회당을 지어주는 일은 로마인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익을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회당을 지었다면 유대 장로들이 감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통념을 초월하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이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었습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유대 장로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화)前 경북대 총장 박찬석교수의 일화
작년에 전 경북대 총장이었던 박찬석 교수의 가슴 뭉클한 고백이 트위터 사이에 화제가 됐습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전교에서 꼴찌를 했는데, 성적표를 1등으로 위조해 아버님께 갖다 드린 후 죄스러운 마음에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 대학의 총장까지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때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공부가 하기 싫어 1학년 석차는 68/68, 꼴찌를 했습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보일 자신이 없어 성적표를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았기에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모르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친지들에게 아들이 1등을 했다고 자랑을 하셨고 가난한 살림에 재산목록 1호였던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했습니다. 겁이 나고 미안해서 죽으려고도 했지만 그 사건 이후 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7년 후 그는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교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손자가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아들이 성적표를 위조했을 때 야단치고 혼내는 것이 통념이지만, 잘못을 알고도 돼지를 잡아 마을잔치를 벌인 아버지의 그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양보의 미덕으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가축들이 많아지자 아브라함 가축의 목자들과 조카 롯 가축의 목자들끼리 다툼이 생겼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롯에게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하라고 양보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당시에 롯은 아브라함의 배려에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요셉도 그렇습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모진 고난을 받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원수를 갚지 않고 용서했을 때 형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메시야로 인정받을 만큼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자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날 만도 했지만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보통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마음이었고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라고 감동하시며 칭찬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통념을 초월하는 감동을 주는 리더였습니다.
(예화)원수사랑
4월 15일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입니다.
15일(현지 시각) 이란 북부 마잔드란주(州) 마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20대 이란 청년 발랄이 검은 눈가리개를 한 채 교수대 앞에 섰습니다. 그는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지만 사형집행인들은 그의 목에 올가미를 씌웠습니다. 7년 전 이 청년은 사소한 다툼 끝에 소년 압돌라 호세인자데(당시 18세)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습니다. 이날은 6년에 걸친 재판이 모두 끝나고 발랄이 공개 처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 숨진 소년의 어머니가 교수대로 다가갔습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이 어머니에게는 발랄을 처벌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발랄을 지탱하고 있던 의자만 발로 차면 교수형이 집행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어머니는 조용히 발랄에게 다가가 그의 따귀를 때렸습니다. 그 뒤 그녀는 교수대로 가서 자신의 아들을 찔러 숨지게 한 발랄의 목에 감긴 올가미를 조용히 풀어주었습니다. 죄를 모두 용서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압돌라의 어머니는 이 장면을 지켜보던 발랄의 어머니와 흐느끼며 서로를 끌어안았습니다. 통상 공개 처형으로 끝났을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 부모들의 화해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통념을 초월하는 감동적인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용서를 했기에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가진 손양원목사님이 왜 그토록 감동을 주는 한국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까?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통념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사람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통념을 초월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희생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희생 없이는 감동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식민지 백성을 감동시켰던 로마 백부장처럼 통념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감동을 주는 리더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믿음을 초월하는 사람(6-7절, 9절):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
6-7절,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9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무엇보다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를 놀랍게 여겨 따르는 무리에게 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이스라엘백성을 능가하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케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종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는 겸손한 믿음과 말씀의 권세를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장교로 예수님을 식민지백성의 한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기의 병사들을 보낼 수도 있었고 다른 종을 보내어 요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 장로들을 보냈고 자기의 친구들을 보내어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직접 자기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한 믿음을 표현해 주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비록 예수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심방을 피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심방이 귀찮아서 거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몸소 집을 방문해 주시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말씀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어떤 신체적인 접촉을 한다거나 환상을 보는 따위의 외적 증거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종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도록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몸이 닿은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종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풍랑을 잔잔케도 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종의 병을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백부장 고넬료도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하여 집에서 영접할 때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로마의 장교로 식민지 백성이며 어부출신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신분을 초월하는 겸손한 행동이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소문이 나면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를 통해 들려지는 말씀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선포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넬료의 겸손한 믿음이 베드로를 감동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감동하셨습니다.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솔로몬은 자기가 구한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려와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릴 때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에 감동을 받아 고쳐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감동시키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실 때 가나안 여인 하나가 소리치며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귀신들인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반응을 보이시지 않자 예수님 앞에 나아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여인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간절하게 매어달렸습니다. 딸의 고통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간절한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이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말씀하시고 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어렵지만 보람 있는 일입니다. 자녀에게 감동을 주는 부모, 부모님께 감동을 주는 자녀가 될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분, 계급, 직급을 초월하여 사랑으로 감동을 줄 때 일터를 행복하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감동을 주는 성도가 될 때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인 백부장이 신분을 초월하고 통념을 초월하여 종과 식민지 백성을 사랑하고 배려할 때 감동을 주었듯이 일반적인 생각과 행동을 초월해야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미는 행동이 원수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의 권세를 믿는 큰 믿음이 예수님께 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구원파는 구원받았으면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합니다. 한번 회개하고 구원 받았으면 이후에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파 교회에 출석해야만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이 가장 큰 은혜임은 틀림없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로마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았듯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감동입니다. 죄인을 의인되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가장 큰 감동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일터, 사회와 국가에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칭찬받고 속한 공동체와 이웃에게 칭찬받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살았다면 잘못된 행동을 회개해야 합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지속적으로 성화되어야 합니다. 감동을 주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신분을 초월하는 사람, 통념을 초월하는 사람, 믿음을 초월하는 사람으로 소외되고 약한 이웃에게,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예수님께 감동을 주는 리더가 되어 공동체를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글은 목사님의 설교 원문 입니다
'옛날설교 > 설 교 말 씀(2017년7월 이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6/9/주일 <영원한 빛> 이사야 60장 18-22절 (0) | 2014.06.10 |
---|---|
2014.6.1.주일<일상을 잔치하는 삶으로> 눅15;22-24 (0) | 2014.06.03 |
2014/5/18주일<주님이 찾으시는 열매> 마가복음11장12-14절 (0) | 2014.05.19 |
2014/5/11/주일<축복의 사람 요셉>창세기45;1-8 절 (0) | 2014.05.11 |
2014/5/4/주일<땅을 파고 거름을 주는 방식으로. . . >누가복음13장6-9절 (0) | 2014.05.04 |